마트에서 사온 체리를 냠냠 먹고서 남은 체리 씨앗을 화분에 심는 것으로 무모하게 시작했던 체리나무 키우기 프로젝트가 벌써 4년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기적처럼 단단한 껍질을 깨고 발아한 귀여운 새싹이 이제는 제법 많이 자라서 1미터쯤 되는 체리나무가 되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잎은 꽤 무성한데도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꽃이 필 생각을 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설마 올해는 꽃이 피겠지? 했는데 결국 열매는 커녕, 꽃도 피지 않았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왜 이 나무가 체리나무라고 굳게 믿었을까? 미운 오리 새끼처럼 어쩌면 오리가 아닌 백조일 수도 있는데??!!! 어디에선가 날아온 어떤 녀석이 여러해살이 풀이라서 나무처럼 자라난 건 아닐까요??? 

그래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키운 체리를 언젠가는 먹게 될 거라고! 

저는 맛집 블로그를 안 믿습니다. 맛집 검색에 성공한 적이 없어서, 내 인터넷 검색사 자격증은 맛집 검색에 아무 소용도 없나보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맛집에 관한 글도 거의 안 올리는 편이었고요.

맛있는 음식을 워낙 좋아하지만, 중식 요리집에 가서 "진짜 맛있다!!!"라고 느낀 곳은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그런데 인생 맛집 발견에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여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니고 지인 소개로 알게 되었어요.

연남동에 위치한 중식당 진가 입니다.

직장생활을 오래한 덕택에 회식비로 참 많은 유명맛집부터 호텔들까지 다양한 곳들을 다녀봤습니다. 본사에서 출장 나오는 분들 덕택에 뜨악 소리 나오는 가격의 메뉴들도 먹어봤어요.

그런데!!! 진가는 제가 지금까지 먹어본 중식 요리들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맛이었습니다. 함께 동행한 분께서 이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추천해주신 두반가지새우를 먹는데, 대박 감동 ㅠ_ㅠ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오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튀긴 가지와 그 안에 큼직하게 들어간 통새우! 그리고 매콤하게 어울어진 소스! (이 맛이 생각나서, 또 침 나와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웃기기도 한 게 가까운 친구들이랑 간 건 아니라서 얌전하게 먹어야 하는 자리였는데, 저도 모르게 너무 흥분을 해서 연신 맛있다는 말만 하고 정말 음식에만 집중했습니다. 소스를 몰래 싸가서 집에가서 햇반에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어요. ㅠ_ㅠ

역시 중식은 여럿이 함께가서 먹는 게 진리인가 봅니다. 음식이 맛있어서 추가 주문을 계속 넣어서 중새우튀김도 먹었는데요. 마요네즈 소스는 원래 느끼해지기 쉽잖아요? 그런데 새콤한 맛이 절묘하게 어울어져서 느끼함은 단 1도 없고, 사진 찍는 걸 잊게 만드는 맛이었습니다.

팔보채는 또 왜 이렇게 맛있는거에요? 저는 원래 친한 사람들 이외에는 낯가림이 있는데다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에 팍팍 못 먹는 편인데, 이날은 가식적인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엄청 뻔뻔하게 먹었습니다. 팔보채에 들어간 신선한 해산물과 야채의 식감이 완전 ㅠ_ㅠ

원래 중식당 유명하다는 집을 찾아가도 유명하다는 메뉴 한두개 빼고는 맛이 다 비슷비슷하고 좀 먹다보면 느끼해져서 더 못 먹게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다릅니다. 각각의 메뉴가 특색과 품격이 있어서 하나의 메뉴에 감탄하고, 다음 메뉴를 먹으면 색다른 맛의 세계에 또 다시 감동 리셋!!! ㅠ_ㅠ

뜬금없는 고백을 하자면요. 저는 중식 요리집에 가서 탕수육 시키는 사람을 살짝 미워합니다. 탕수육은 짜장면 배달 시킬 때 먹는 흔한 메뉴인데, 그걸 이렇게 훌륭한 곳에서 먹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탕수육을 시켜야 한다는 분이 갑자기 등장 ㅠ_ㅠ 으악! 왜???? 싶었는데 탕수육을 한입 베어물고서 바로 그분께 무릎을 끓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저는 후각 하나는 뛰어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집이네 어쩌네 해도 돼지냄새가 안 나는 집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탕수육에서는 돼지 냄새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식감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 촉촉하고 튀김옷은 바삭해서 달콤새콤한 소스와 찰떡같이 어울어지더라고요. 저는 항상 탕수육은 부먹 vs. 찍먹 중에 늘 찍먹파였는데 여기는 부먹이 진리입니다. 소스에 버무려서 나오는데 완전 겉바속촉!!! (또 침 나옴 ㅠ_ㅠ)

위의 사진은 내 인생에 이런 맛은 없다 싶었던 홍소우럭!!!! 생선 잘 못 드시던 분까지 어쩜 생선 냄새가 하나도 안나고 너무 맛있다고 하시면서 정말 머리까지 싹 다 발라내서 드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라조육에 들어간 간장소스는 또 왜 그렇게 맛난 거에요? 야채랑 환상 호흡! 꼭 여럿이 가셔서 다양한 메뉴로 드시기를 권합니다. 차 안 몰고 갔으면 연태고량주랑 같이 먹는건데!!!! 대중교통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 그리고 살짝 독한 술을 곁들이면 더 금상첨화겠다 싶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저만 천년만년 알고 혼자 숨겨둔 맛집으로 두고 싶은 그런 곳인데요. 인터넷 검색으로도 맛집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입증해 보고 싶어서 남겨요!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까 여기 쉐프분께서 호텔 주방장 출신의 엄청 유명한 분이셨네요. 어쩐지 눈물 나게 맛있다 했더니 역시....... 요리 사진 좀 열심히 찍을걸!!! ㅠ_ㅠ 다음번 친구들과의 연말모임은 여기로 고고!!!

저는 정치에 대해 잘 모릅니다. 뉴스를 보면 늘 답답한 소식들만 들리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자연히 관심을 끄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처음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생겼고 이번 총선에서는 그 당을 지지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탈핵에너지 전환과 기후변화 대응을 이야기하며, 차별금지법 제정, 동물권 보장을 주장합니다. 그 당의 이름은 녹색당입니다. 저는 지는 게 싫어서 스포츠도 무조건 이기는 팀을 응원하는 사람인데, 승패를 떠나 이들의 주장에서 희망을 보고 정치에 관심을 갖기로 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는 녹색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지만, 정당투표에는 15번 녹색당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녹색당은 지난 2012년 총선에서 0.48%, 2014년 지방선거에서 0.84%를 득표했다고 해요. 이번 총선에서 정당득표율 3%를 얻어야 국회에 비례대표를 세울 수 있다는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이 질문의 답은 아래의 우화에서 스스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밀림에 큰불이 나서 동물들이 달아나는 데 벌새 한 마리가 불을 끄려고 물을 머금고 오갔습니다. 코끼리가 물었답니다. 그 정도 물로 불을 끌 수 있겠어? 벌새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벌새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 사회를 바꿔나갈 때입니다." (신지예 후보)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4세기 로마의 군사 전략가 베게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군사학논고>에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라니 참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에는 전세계와 우리나라에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았습니다. 울컥하게 화가 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운 빠지기도 하는 사건 사고들의 연속이었는데, 결국 평화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이들이 끝없는 증오와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프네요.

저는 가톨릭신자인데, 미사가 끝날 즈음에 교우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며 "평화를 빕니다 (Peace be with you)"라고 말합니다. 습관처럼 그냥 주고받는 말이라서 그 뜻에 대해 굳이 되새김질하지는 않았는데, 요즘 들어 그 말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순간에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처음 건넨 인사말이 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6-9)"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굳이 즐겨보지 않더라도, 생태계의 질서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위의 성경 속의 표현이 세렝게티의 초원에서 실현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요. 우리가 아는 모습은 바로 이거잖아요.

뜬금없이 세렝게티의 표범에게 초식을 강요하자는 말도 아니고, 야생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걸 몰라서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함께 사는 사회는 세렝게티가 아니고, 우리는 지성과 윤리를 가진 인간이잖아요. 승자독식 (Winner takes all)의 사회는 결국 우리 모두를 병들게 만듭니다. 곰이 풀을 뜯어 먹지 않는 한, 암소와 곰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강자가 자신이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한, 힘을 내세우면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평화와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오늘 장마가 시작한다더니, 오전에 잠깐 비가 내리는 정도로 끝나버렸습니다. 요즘 가뭄 때문에 근심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단비가 내려서 하루 빨리 시원하게 해갈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5년이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6월이 끝나간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이렇게 더욱 더 빨리 가는걸까요? 초등학교 때를 떠올려보면, 여름 방학이 너무 천천히 가고 심지어 한나절도 참 긴 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요즘은 한달이, 아니 한해가 너무 빨리 갑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잘 가는건지 혼자 이유를 생각하다보니 별별 잡다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아래에 적어놓은 내용은 철저히 제 상상에 근거한 것이니, 말도 안 된다고 하셔도 어쩔 순 없어요. 태클금지!! ^^

1. 생체시계와 시간의 인지

생체시계와 혹시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 참 재미있는 실험을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요. 10대와 20대, 30대, 40대, 50대와 60대 집단을 대상으로 '1분이 되면 손을 드세요'라는 지시를 듣고서 각 집단이 얼마나 정확하게 시간의 경과를 예측하는가에 관한 실험이었습니다. 정말 흥미롭게 50초가 채 되기도 전에 10대 대상자가 손을 들었고, 20대와 30대가 비교적 정확하게 시간을 예측했는데요. 60대 집단은 1분이 훌쩍 넘어서 한참 흘러도 손을 안 드는 겁니다. ^^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정답은 저도 모르지만,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신체의 기능들 가운데 몇몇 부분이 조금씩 닳고 조금씩 퇴화되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심장 박동도 예전보다 조금씩 천천히 뛰고 눈도 덜 깜박이고 호르몬도 덜 나오다보니 1분이라는 시간을 제대로 못 재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럼 10대는 왜 그렇게 빨리 손을 들었느냐고 물으시겠죠? 10대는 호르몬과 심장박동, 기타 등등의 모든 것들이 과잉의 상태니까 10초가 1분같은, 하루가 한달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

네이버에서 맥박에 대해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나오네요~ "맥박수-성인에 있어서는 1분간에 평균 60~80쯤 되지만 성별, 연령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여자는 남자보다 5~6회쯤 많고 나이가 적을수록 맥박수가 많아져서 신생아 130~140, 젖먹이 90~110, 아동기와 소년기 80~90이다."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연중에 맥박 속도로 시간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더디게 가는 건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요.

2. 경험치의 차이

제 두번째 가설은 '겪어온 사건들과 경험치의 차이' 입니다. 어딘가 초행길을 갈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세요. 그 낯선 길은 참 길게 느껴지실 겁니다. 하지만 그 길이 조금씩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턴 그 길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을 거에요. 난생 처음 극장에 갔던 경험, 처음으로 동네 구멍가게에서 뭔가를 샀던 기억, 처음 초등학교에 등교하던 경험, 처음 사랑에 빠지던 추억... 이 모든 것들은 참 세밀하게 느끼고 참 느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번 세번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경험의 틀 안에서 조금은 수월하게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일단 패턴을 파악하게 되면 덜 긴장하게 되고 예전의 경험들을 대입해보게 되지요. 경험이 쌓인 일들을 할 때 마음이 편해지니 시간은 자연히 잘 가게 되지요.

3. 살아온 날들의 길이

세번째 가설은 인생 길이의 상대성 때문입니다. 7살짜리에게 1년은 인생의 1/7이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지만, 70세 노인에게 1년은 인생의 고작 1/70밖에 되지 않는 찰나와 같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비유하자면 7살짜리의 1년은 70세 노인의 10년과도 같은 정말 엄청나게 긴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쪽의 두 그림을 잘 살펴보세요. 어느 선이 더 길어 보이시나요?

착시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들은 슬쩍 눈치를 채셨겠지만, 정답은 1번과 2번 모두 같은 길이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엔 1번이 더 길어 보이시죠? 좁은 공간에 있는 1번과 비교적 넓은 공간에 있는 2번이 같은 길이 임에도 불구하고 1번이 더 길게 보이는 것은 사람의 눈이 실제 사물의 물리적 특성과는 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물을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게 아니고 상호관계를 통해서 본다고 하거든요. 배경에 따라서, 선의 길이, 크기 형태, 방향 등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80세 인생을 살아온 노인에게 1년이라는 것은 위의 그림에서 본 2번선 같은 짧은 시간겠지만, 5살 인생의 꼬마에게 1년이란 1번선 같은 굉장히 긴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결론

참 별 시덥지 않은 주제인데 열심히 적다보니 시간이 후딱 지나갔어요. 누군가가 오래 전에 이미 이런 것들을 훨씬 더 멋지고 분석적인 언어로 기술했거나 체계적인 이론을 잡아 놓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그동안 제가 시간에 관해 생각했던 잡설들을 끄적거리면서 나름 재미있었어요. 

각각의 가설에 나온 내용들을 잘 활용하면 인생이라는 시간을 후딱 지나가는 걸 조금이나마 막아 볼 수 있진 않을까요? 1번 가설에 기반한다면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뛸 수 있는 기회들을 자주 만들어서 운동을 한다든가 활동적인 생활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요. 2번 가설에 기초해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험들을 한다든가 새로운 내용들을 배운다든가 하는 걸로 긴장과 자극들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줘서 자신의 시간이 조금 느리게 가게끔 할 수도 있겠지요. 3번 가설이 맞다면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전체 길이를 보지 말고 한순간 한순간에 집중하다보면 상대적으로 우리의 1년은 꽤 긴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단히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저의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빠르게 흐르게 될거에요. 절대적인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는데 상대적인 시간은 나날이 더! 더! 더!!! 빨리 간다는 게 살짜쿵 우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시간을 더 아껴 써야 겠다는 계몽적인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엔 어떤 가설이 제일 설득력 있게 느껴지시나요?

오늘날 수많은 일선 학교에서 대두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집단 따돌림의 원인과 해결방안들이 논의될 때면, 장년층 분들께서 꼭 말씀하시는 내용 중 하나가 '우리 어릴 때엔 그런 문제가 없었다'는 식의 반응입니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이지메 현상을 겪어 왔지만 우리에게는 1990년대만 해도 이런 것들이 다소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고, 실제로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는 왕따나 집단 따돌림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용어가 없었다고 해서 당시에 집단 따돌림의 문제 자체가 없었던 것일까요? 이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참 신기하다고 느꼈던 점 중에 하나는 도심이나 동네 거리, 어디에서나 장애인들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도심에서는 장애인을 만나는 일이 굉장히 드문 일인데, 파리에서는 장애인들과 가끔씩 마주칠 수 있었고 심지어 저와 기숙사에서 한 방을 나눠 쓰던 룸메이트의 남자친구 역시 경미한 장애를 갖고 있었지요. 왜 파리에서 저는 많은 장애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국가별로 전체 인구 중 장애인 비율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와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장애인의 비율이 아니라 그들이 거리로 나올 수 있는 심리적 장벽의 높이 차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생뚱맞게 갑자기 장애인 이야기를 왜 꺼내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주류가 아닌 비주류나 소수자들에게 참 가혹한 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장애의 유무에 기인하는 장벽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불합리한 종류의 장벽들과 집단 따돌림이 조금은 다른 형태로 우리 문화 안에 참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더욱 공고해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 이데올로기라는 높은 벽에 가로막혀 다문화 가정의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남몰래 눈물 흘리고 있으며, 정상인과 비정상인이라는 장벽에 막혀 장애인들은 현관 밖으로도 나오지 못해 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예전에 집단 따돌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해왔던 것이지요. 

게다가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 체계는 옳음과 그름에 대해 단 하나의 잣대만으로 평가하여 획일화된 기준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학교 교육체계 속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워 왔을까요? 단 하나의 정답만을 추구하며 그 답에 자신을 비집어 넣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 아이들은 한편으론 그런 세상을 원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조금 다른 소수의 아이들에게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이 집단 따돌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와 조금만 달라도 마치 그것은 ‘틀린 것’ 인양, ‘잘못된 것’인양 매도하고 배척하는 문화가 우리들 안에 참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이 집단 따돌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고들 하지요. 다수의 아이들이 조금 다른 소수의 아이들을 따돌리는 모습은 소수자를 배척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애인, 다문화 가정, 성적소수자, 독거노인에 이르기까지 힘없고 수적으로 열세에 속하는 이들에게 향하는 이유 없이 따가운 시선은 – 참 부끄럽긴 하지만 – 제가 어릴 때에도 있었고 제가 성인이 되어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집단 따돌림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봅니다.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청소년 집단 따돌림 문제들을 어떻게 단순히 청소년만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그 문제만을 분리하여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아이들에게만 변화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그 해결을 위해 두 가지 측면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근본적이고 내면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청소년부터 중 장년층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반성하고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모두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획일화된 교육체계, 소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존재의 욕구쯤은 희생하라는 식의 배금주의, 잘못된 방향의 강압적 집단주의,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내면부터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선진국들의 과학기술이나 경제시스템만 모방했을 뿐, 철학이나 이념, 사상과 같은 내적 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이 기적적인 경제적 성장은 이룩했을지언정 우리 안의 마음은 심하게 병들어 OECD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과과정, 각종 미디어의 컨텐츠 개발단계, 정부 정책 전반까지도 인간의 존재의 가치에 대한 성찰과 다양성 존중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입니다.

두 번째로 건전한 또래문화 형성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 개발들이 시급합니다. 집단 따돌림을 하지 말라는 캠페인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집단 따돌림] 이라는 문제상황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또래들이 건전하게 어울릴 수 있는 단체활동들을 개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다양한 아이들이 모이는 것을 장려하고 예산을 지원하여 심적으로 소외 받는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 주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일선 학교에 심리상담을 전공한 상담교사들을 배치해 실질적인 상담기회를 학생들에게 준다면 지금보다 상황은 훨씬 더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가시적인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기나긴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집단 따돌림을 막고 아이들의 마음을 돌보아 자살률을 낮추는 것은 출산율을 높이는 것만큼이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첫걸음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몇년전쯤 우연히 신대방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유럽여행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맥주를 만났더랬습니다. 그 맥주는 이름하야 슈무커 헤페바이젠(Schmucker Hefeweizen)!!! 예전에 독일 뮌헨에 놀러 갔을 때 마신 맥주와 너무나 흡사한 풍미를 서울에서 만나게 되어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남들은 독일 뮌헨에 놀러 가면 호프브로이하우스에 간다고들 하던데 저는 그런 교과서적인 여행이 괜스레 싫었어요. 여행 가이드북을 숙독한 한국인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들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독일 아저씨들이 바글바글한 역앞 선술집에 즉흥적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북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정말 허름한 맥주집이었는데, 현지인들이 어찌나 가득하던지요. 우연히 독일행 열차에서 만나 알게된 한국인 학생과 의기투합하여 당당하게 입장! 저희는 그곳의 유일한 여성 손님들이었고 또한 유일한 동양인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맥주를 시켰는데 우리나라 맥주와 다르게 약간 희뿌연 느낌인데 더욱 향긋하고 덜 톡쏘는 부드러운 느낌이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탄산이 너무 강한 느낌의 음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맥주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다지 즐겨 마시지 않았더랬는데 독일의 그 선술집에서 만난 맥주는 제가 싫어하던 강한 탄산은 덜 갖고 있고, 선호하는 모든 특성들은 아주 환상적으로 조화시켜 놓았더라구요!! 동양인 여대생들에게 무한애정을 쏟는 독일 아쟈씨들의 관심 따위는 뒤로 한 채, 정말 끝내주게 맛있는 맥주 덕택에 당시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답니다.

서울 살때는 슈무커 헤파바이젠 때문에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자주 가곤 했는데 이제는 먼 곳으로 이사와서 가끔 그 맥주맛이 그립습니다. 병으로 구입하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병맥주로 구입할 수 있는 도매점 또는 소매점이 있다면 전용잔과 함께 꼭 사고 싶은데...ㅠ.ㅠ (사실은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을 때에 사장님께도 잔이랑 병맥주를 구입하고 싶다고 여쭈어봤는데, 그 가게에서는 생맥주만 취급하는데다 맥주잔은 판매용도 아니기에 팔 수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더라구요. 힝~ 아무리 멀더라도 계속 찾아 오라 이거죠!!!?) 우리가 그동안 흔히 마셨던 맥주는 원료가 보리인데 반해, 슈무커 헤파바이젠의 주원료는 '밀'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필터링을 하지 않아서 효모가 더 살아 있대요. 그래서 맛이 좀 더 부드럽고 달짝지근~ 향긋향긋. 뭐 이런가봐요.

이 맥주는 단연코 '가장' 맛있는 맥주 라는 평이 아깝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기회되시면 꼭 한번 마셔보세요. 소세지를 곁들인 슈크루트를 안주삼아 함께 드셔도 좋고, 화덕에 구운 마르게리따 피자와 함께 드셔도 환상 조합입니다! 아....문득 떠오르는 추억! 몇년 전엔 그런 적도 있었네요. 하루는 퇴근길에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러 슈무커 헤페바이젠을 시켜놓고 2층 발코니 자리에서 창밖을 보는데 하늘 귀퉁이에 무지개가 살짝 떠있는거에요. 아주 아주 차가운 잔에 담긴 끝내주는 맥주 한 잔, 그리고 하늘엔 무지개...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아주 달달하게 몽환적이고도 행복한 순간이 되었더랬죠. 맥주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뿌옇게 먼지낀 책을 들춰보는 것처럼 잊혀져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네요. 헤헷. 주말엔 슈무커 헤페바이젠을 찾아서 동네 맥주가게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녀 봐야겠어요!!^^

2010년경에 한 명문대 학생이 자퇴를 결정하고서 자신의 생각을 대자보를 통해 밝혔고 이 내용은 주요일간지에 기사화되었습니다. 그 대자보 내용이 당시 직장생활 10년차쯤 되었던 제 마음속에 큰 울림으로 와 닿았는데, 아직도 가끔씩 그 글을 떠올리며 내 자신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원문보러가기) 그 글에서 그녀는 자신을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하는 경주마에 비유했습니다. <누군가를 따돌렸고 내가 꽤 우수한 성적으로 앞서고 있다고 생각할 때쯤 또다시 경쟁 질주는 시작된다>는 메타포는 바로 우리의- 아니 바로 제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자격증 장사 브로커로 전락한 대학교육, 그리고 초원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피 튀기는 무한경쟁의 트랙에 서있는 우리들. 

 

그녀의 글을 철부지 대학생의 투정쯤으로 치부하기엔 메시지가 담고 있는 바가 너무나 강렬했습니다. 직장생활을 10년쯤 해보니까 그딴 투정은 배부른 헛소리라고 코웃음 칠 수도 있었겠으나, 실상은 정 반대였습니다. 직장생활을 10년쯤 해보니까 정말 이 세계는 끝없는 트랙이자 거대한 기계였고, 저는 경주마인 동시에 사소한 부품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잠깐 추월하고서 푸르른 초원에 도달할 거라는 행복감에 도취되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습니다. 또 다른 경쟁이, 또 다른 살육이, 또 다른 전투가 다시금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언제쯤 초원을 달릴 수 있을까 꿈꾸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고, 그 치열한 취업시장에서 어찌 어찌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잘 살아 남았는데 이 경주는 끝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달리던 수많은 이들이 조금씩 줄어들 때에 약간의 우월감을 느낀 것도 사실인데, 역설적으로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불안감도 커졌습니다. 

 

그렇게 일에 대한 불평도 늘어나고 짜증도 늘어나던 요즘, 문득 제 스스로의 커리어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과연 "경주"하는 내내 불행했을까요? 오히려 정 반대였습니다. 때로 눈물 쏙 빠지게 힘들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참 행복했고 감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제 인생의 목표가 "타인보다 빠르게 달리기" 나 "레이스에서 우승하기"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커리어우먼으로서 대단한 성공을 쟁취하진 못했어도 일할 곳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제 땀이 담긴 선물도 할 수 있었고, 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었고, 일터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힘든 순간들을 이겨냈다는 성취감도 느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법도 익혔지요.  

 

요즘도 저는 여전히 투덜거립니다. 지금 하는 일이 끔찍하게 싫을 때도 있고 회사에서 생긴 고민들을 머릿속에 그대로 담고서 집까지 돌아와 밤새 잠까지 설칠 때도 있습니다. 우울함의 늪에서 한참 헤매기도 하고 새로운 직업 세계를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미' 저는 초원을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론 자신이 하찮고 비굴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회피하지 않는 이유는 제게 더욱 소중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눈에 저는 지루하고 끝없는 트랙을 달리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제 이상과 가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제 마음은 이미 초원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노동의 신성함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비굴함 덕택에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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