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하루는 아침 등교시간에 굉장히 붐비는 만원 버스를 탔습니다. 학교 앞 정거장에 거의 도착해서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문 앞으로 겨우 나왔지요. 그런데 워낙 북새통이라 제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버스 문이 닫혀 버렸고, 버스기사가 서둘러 차를 출발하려 하는 겁니다. 뜨악!!!!!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어서 내려야 하는데 말이죠! "Excusez-moi! Ouvrez la porte, s'il vous plaît. (실례해요!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라고 외치려고 하는데 제 소심한 "Excusez"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저의 절박한 표정과 내리려는 몸짓을 힐끗 본 어떤 남성이 정말 우뢰와 같이 큰 목소리로 "La porte!(라 포흐뜨)", 우리 말로 하면 "문"이라고 버스기사를 향해 외치는 겁니다. "실례합니다" 라든가 "~해주시겠어요?" 뭐 이런 말도 필요 없었고 그냥 문! 이라고 외친거죠. 그런데 버스기사가 정녕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고픈 건지 그 소리를 무시하고 출발하는데 이번엔 또 다른 여성이 다시 외쳤습니다. "La porte!!!!" 그들 덕분에 출발했던 버스는 결국엔 다시 세워졌고, 다행히도 저는 버스에서 내려 학교 수업시간에 잘 도착했습니다.

이때 정말 중요한 두 가지를 배웠는데, 하나는 프랑스에서 버스 문을 열어 달라고 할때는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La porte라고  외치면 된다는 것. ^^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절박한 소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열린 마음을 가진 다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버스를 내려야 했던 사람은 사실 저 하나밖에 없었으니 저 혼자만 희생하고 그냥 버스가 출발했다면, 다수의 승객들은 목적지에 아주 조금은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면하지 않았고 저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 주었으며, 아주 사소한 도움이었으나 저는 그들에게 진정 감사했고 감동했습니다.

사실 그때껏 살면서 저는 아주 많은 순간에 소수이기보다는 다수였고, 비주류이기 보다는 주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절실히 부탁할 일도 별로 없었고, 도움을 필요로 한 적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보호 받았기에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지요. 소수는 대의를 위해 희생될 수 밖에 없다고 제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은연 중에 마음 속으로 그리 믿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머나먼 타국의 다소 엉뚱한 상황에서 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소수자가 덜컥 되어 버렸습니다. 국적에서의 소수자, 인종에서의 소수자, 언어의 소수자, 게다가 버스에서 당장 내려야 하는 단 한 명의 버스하차 소수자... 그 후로 인생을 살면서 어떤 중요한 사실에 조금씩 눈뜨게 되었지요. 흔히들 말하는 효율성이나 자유, 다수결이 전부가 아니며, 그것들 만큼이나 꼭 지켜져야 할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말입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나무꾼이 나무들을 찾아와 부탁했습니다. "내 도끼에 맞는 나무 자루를 얻고 싶소." 나무꾼의 제안은 매우 조심스러웠지요. 그래서 몇몇 중요한 나무들이 신중하게 논의를 거듭한 끝에, 가장 볼품없고 초라한 물푸레나무를 제공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나무꾼은 그 물푸레나무 토막을 잘 다듬어 도끼 자루로 만든 다음, 본격적으로 나무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사방 팔방으로 마구 후려쳤고, 심지어는 숲의 가장 훌륭한 나무들까지도 마구 쓰러뜨려 버렸지요. 이에 떡갈나무가 히말라야 삼나무에게 말합니다. "최초의 양보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나무꾼의 제안을 거절해서 저 친한 동료를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텐데..." 

오늘 우리는 한국 사회라는 이름의 버스 안에 올라타 있는 수많은 승객들 중 하나라서, 다른 한 명의 승객을 희생시키고 버스가 그냥 출발하더라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 자신이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그 단 한 명의 절박한 승객이 될지도 모르고, 숲 속의 볼품없는 물푸레나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과연 "나"라는 한 사람의 권리를 위해 과연 목소리를 높여 버스문을 열라고 외치거나, 그 물푸레나무를 베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까요? 때로 일부의 희생이 당연한 것인양 말하고, 그들이 받는 피해는 그 희생자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된 결과일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를 향한 부당한 차별,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에서 생기는 불합리한 폭력, 비주류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불평등에 대해 오늘 내가 침묵하거나 또는 동조하다보면 훗날에는 우리 자신이 "다수"의 눈에 불편한 존재가 되어 단죄의 대상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작은 목소리들을 위해 크게 외쳐 주세요. 차별받거나 희생되어야 할 대상자를 우리 인간들 중 그 누가 감히 결정할 수 있을까요? 어떤 기준으로요? 어떤 잣대로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judge)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7:1-2)" 우리가 타인을 심판하고 그들의 희생에 침묵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심판과 차별,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마틴 니묄러 목사가 쓴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 교도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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