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저희 집에는 세계명작동화라는 빨간색 하드커버의 동화 전집이 있었습니다. 전집이라고는 했으나, 책장에 온전하게 나란히 끼워져 있는 법이 없었죠. 화장실에 두 권, 책상 옆에 한 권, 피아노 위에 한 권...여기 저기에 어지럽게 놔두고는 손이 갈 때마다 읽곤 했는데요. 유치원에 다녀와서는 따뜻한 방바닥에 엎드려 엄마가 주신 누룽지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그 동화책들을 읽던 나른한 오후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어떤 날엔 상상 속에서 소공녀 세라가 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엔 해저 이만리 속의 주인공이 되어 정신없이 도망치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몽구스와 독사의 결투에서는 제가 어린 몽구스가 되어 뱀과 사투를 벌이기도 했고요.

몽상가 기질과 그 책들 덕분에 저는 상상력이 참 풍부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엔 제가 위대한 화학자가 되어 아무도 몰랐던 엄청난 신약을 개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져 집에 있던 모든 약들을 꺼내서 모두 한데 모아 가루로 만든 다음 정성껏 개어 보기도 했지요. 제가 조금 더 무모했더라면 그 짬뽕약을 먹어 보고 효능까지 확인했을 텐데, 안 그랬던 게 참 다행이지요...^^ 외교관이 되어 전세계를 다니는 상상에 빠져 영어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구요. 또 어떤 날엔 나이팅게일 같은 간호사가 될거라는 희망에 빠져 주사기를 갖고 놀다가 큰 일 낼 뻔하기도 했어요. 

요즘은 상상합니다. 제가 지금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라고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제 재능이나 노력에 비해 많은 것들을 얻는 행운을 누리고 있으며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송구스럽기도 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 들어, 앞으로 더 노력해서 많이 베풀며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곤 합니다.

국제적십자사연맹(IFRC)는 세계재난보고서를 통해 전세계 인구의 15%정도인 9억2500만 명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만약에 한 교실에 40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중 6명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다는 뜻이지요. 교실의 다른 한켠에서는 비만으로 살을 빼겠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죠. 세계 비만 인구의 수가 기아인구를 넘어선 현상은 빈부 격차가 점점 심화하는데다 국제 곡물 가격 급등으로 식량 구입 능력에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지요. 국제 곡물가격은 올들어 투기적 거래와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해 급격히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은 어디에 서있나요? COVID-19로 인해 우리 모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 주변을 좀 더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최근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히 기아의 문제를 야기할 뿐 아니라, 결국 학습기회에 관한 문제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 빈곤의 세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서관이 문을 닫고, 학교에 갈 수 없을 때, 학교 급식이 중단될 때, 가장 고통 받게 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답답해집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25,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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