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라이어 캐리가 내한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녀의 소름끼치는 가창력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고등학생 시절의 추억 속에 빠져 배시시 웃었더랬습니다. 제 추억 속의 머라이어 캐리는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살짝 신경이 곤두설 정도의 돌고래 가창력의 대명사였으니까요. 회사 동호회에서 다 같이 그녀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저 역시 냉큼 신청을 했지요. 일본 공연에서 형편없는 가창력으로 혹평을 받았다는 신문기사를 읽긴 했지만, 설마 설마 했습니다. 공연 당일에 올림픽공원에서 제 눈으로 직접 그녀의 무대를 보면서 그 '설마'는 '현실'이 되었지요. 서너 곡쯤이 흐르고 나니, 심지어 좌석을 떠나는 관객들까지 나타났고요. 어떤 이는 아예 무대를 등지고서 그날의 개기일식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Emotion의 반주가 흐르자 초반에 환호하던 관객들조차 그녀의 형편없는 노래가 흐르자, 싸늘한 침묵과 함께 실망의 탄식까지 나왔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자 한 때의 디바였던 머라이어 캐리에게 짠한 동정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귀여운 아이들을 녹화한 동영상이 무대 스크린을 통해 보여질 때에 전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뮤즈였던 여신이 이제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건가... 엄마가 되고 나이가 들면, 성대도 일종의 근육이니 예전같지 않은 게 당연한 것인데 내가 혹여 그녀에게 너무 과한 것을 바란 것은 아닌가.... 그 비싼 가격이 무색한 형편없는 노래로 들으면서, 너무 과한 것을 기대한 자신을 반성했었습니다.  

공연 시작시간보다 한참을 늦게 등장한 그녀는 참 실망스러운 공연을 내내 보여주고서 마지막 곡으로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불렀습니다. 그리고선 Thank you 를 딱 세번 외치고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하게 공연이 끝났고,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정말 이게 끝이냐고 서로 물었습니다. 관객의 박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작별 인사는 없었고 커튼콜 역시 당연히(?) 없었으며 그렇게 허무하게 추억 속 디바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저는 그녀의 노래보다 그 태도에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아티스트로서 최.소.한의 예의와 성의를 한국 팬들에게 보였다면 저는 이런 글을 적지 않았을 겁니다. 나이가 들었으니까 목소리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그 무대를 준비한 코러스와 악기 연주자, 댄서와 모든 스탭의 노력 덕택에 빛나는 공연이었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귀가 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머라이어 캐리를 뺀 공연의 나머지 부분들은 실제로 좋았습니다) 그러나, 돌고래 창법의 환상적인 추억 속 디바는 이미 사라지고, 형편없는 가창력으로 뻔뻔하게 노래를 부르며 관객에 대한 예의도 모른 채 공연 수익만 노리는 야시시한 드레스 차림의 탐욕스러운 여성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바로 오늘, 제가 사는 동네의 작은 아트홀에서 '로스 로메로스' 공연을 봤어요. 다소 따분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서 예매한 클래식 기타 공연이었는데, 정말 기분 좋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제지간인 할아버지 두 명과 그 할아버지의 아들과 조카, 이렇게 네 명이 눈물나게 아름다운 기타 선율로 2시간을 꽉 채웠습니다. 솔직히 큰 기대 없이 갔던 연주회였는데, 그 두 시간동안 말도 안되게 행복했습니다. 풍부한 감성과 뛰어난 기교의 기타 연주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곡이 끝날 때마다 할아버지 연주자들의 행복한 미소에서 그들의 온화한 에너지가 모두에게 따뜻하게 전해졌습니다. 공연이 끝나고서도 끝없이 환호하는 관객들을 위해 이 분들은 무대를 내려갔다가도 다시 올라오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아름다운 앙콜곡들로 화답했습니다.

네 명이 함께 연주한다고는 해도, 오로지 기타 소리 만으로 이렇게 꽉 채워진 음악이 될거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한 명이 독주를 펼칠 때엔 혼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고 화려했으며, 네 명이 함께 연주할 때에는 마치 한 명이 연주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습니다. 화려한 테크닉과 유려한 스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감성이 녹아있는 연주였어요. 기타 현이 이렇게 다양한 소리를 품고 있는 줄 몰랐는데 '심금(心琴)'을 울린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현악기가 갖는 매력에 매료되었습니다. 때로는 달콤하게 현을 가볍게 훑고, 때로는 거문고처럼 애절하게 퉁기고, 또한 때로는 카혼처럼 경쾌하게 기타의 몸통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3대째 기타를 연주하는 가문이라고 하던데 역시 그 명성에 걸맞은 무대였습니다. 이 멋진 가족을 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아름다운 기타 선율을 또다시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올까요?  겉만 번지르르한 장사꾼 M양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소박한 아티스트의 음악으로 치유받은 느낌이었습니다.

비싼 건 나쁜 법이 있어도, 싼 건 좋은 법이 없다던가요? 그 말은 틀렸습니다. 머라이어 캐리 내한공연 티켓가격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이렇게 빼어난 공연을 만끽했으니까요. 음악가도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다고요? 그 말도 틀렸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연주는 머라이어 캐리의 녹슨 성대를 간단히 비웃었어요. 뭐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그런 비교 자체가 로스 로메로스와 같은 훌륭한 아티스트 패밀리에게는 모욕이니까요.  (어딜, 감히!!! 결론은 기.승.전.... 로스 로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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