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제 비밀 한 가지를 솔직하게 털어 놓겠습니다. 저는 이 블로그에 짧고 보잘 것 없는 글을 하나 올릴 때조차 그 안에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제 나름의 철학과 주장을 슬쩍 숨겨 놓습니다. 블로그의 짧은 메모, 하찮은 손뜨개질,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흔들린 사진조차 그것만의 의미가 있을진데, 정성을 담아 만든 작품은 오죽하겠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을 닥치는대로 아무 뜻없이 허투루 할 리가 만무합니다.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글을 쓸 때에 사람들은 끊임없는 고민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당나라의 가도(賈島)라는 시인이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밀다(僧推月下門)’란 시구를 써 놓고 ‘밀 퇴(推)’ 를 쓸 지, ‘두드릴 고(敲)’를 쓸 지 고뇌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작가들은 퇴고(推敲)의 과정을 거치며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곤 합니다. 주제의 결정부터 단어의 선택까지도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관념의 일부분이 투영이 되고 그 생각의 조각들이 작품 속에 아로새겨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 속에 숨어 있는 복잡한 은유의 퍼즐을 하나 하나씩 뜯어서 맞춰보고 그 속의 숨은 그림들을 찾아보는 과정들은 참 재미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참 좋아하는데, 그 단순하고 유치한 줄거리 속에 숨겨진 뜻에 탄복하기도 하고, 감동해서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가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더 눈에 잘 띄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슨 가족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적도 있으니,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는다고나 할까요. 헤헤..^^

이렇게 만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탓인지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을 우연히 보며 기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재미있고 굉장히 충격적인 스토리이긴 한데, 뭔가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죠.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어딘지 모르게 어그러진 느낌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니메이션을 정말 열심히 봤습니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은 아직 완결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 작품을 잘 모르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줄거리의 일부를 말씀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을 포식하는 다수의 거대생물 '거인'의 침공에 의해 인류는 존망의 위기에 직면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삼중으로 구축된 거대한 성벽안에서 사는 것으로 일시적인 안전을 얻게 된다. 성벽으로 인한 평화를 얻고 나서 약 100년 후, 부모님과 소꿉친구 미카사와 함께 살던 소년 엘런은 친구 아르민과 성벽밖으로 나가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돌연히 나타난 초대형거인에 의해 외벽이 부서지고 그 구멍을 통해 다수의 거인이 시가지에 침입, 그로 인해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엘런은 복수를 맹세한다. 벽의 붕괴로부터 2년 후 엘런, 미카사, 아르민 세 명은 제 104기 훈련병단에 입단하여 동기들과 함께 훈련을 시작한다. (출처: 위키백과)

높은 벽이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고 생각하던 인간들의 안이한 평화는 결국 거인의 침공으로 인해 산산 조각나며, 인류는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스토리에 나오는 성벽과 거인의 메타포(metaphor)를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자비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떠올릴테고, 어떤 이들은 전쟁과도 같은 현대인의 삶을 떠올릴 테죠. 어떤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할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작품 속 상징의 의미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진격의 거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역사 인식에 관한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최근 하시모토의 위안부 관련 망언,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일본의 역사 왜곡과 독도 논쟁으로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내용들 때문에 이런 관점으로 만화를 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의구심은 아주 사소한 두 가지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왜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 속 주인공은 항상 작게 묘사되는 것일까? 그들은 왜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캐릭터 -가령 아톰과 왕눈이, 케로로- 들은 아주 작고 선하며 자신만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며 살아 갑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좌절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요. 2차대전이 패전으로 끝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던 일본인들은 작고 불완전한 아톰의 칠전팔기 스토리를 보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왕눈이는 비록 가난하고 깡마른 아이지만, 비바람이 몰아치고 투투가 아무리 구박해도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넘어져도 일어나 피리를 부는 초긍정 개구리입니다. 케로로는 지구 침략의 음모를 갖고 지구에 왔다고 공공연히 떠들지만, 이 귀요미 개구리 중사는 매일 개그혼을 불태우며 우주네 집안 청소를 담당합니다.

"진격의 거인" 속 주인공 역시 거인에 비해 너무나 작고 힘없는 존재이며, 그의 이웃과 가족은 그 도륙의 현장에서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끔찍하게 잡아 먹히고 맙니다. 결국 작다는 것은 연약함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동정의 대상이 되어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독특한 힘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작은 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거대한 존재에게 저항을 시작할 때에 우리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유린 당하던 작고 힘없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 일본인들은 자신을 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일본은 작습니까? 일본은 진정한 피해자 입니까?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을 비롯한 독일, 이탈리아가 주축이 되어 벌인 세계 규모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세계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있었지요.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했지만 실제로 일본이 한 일은 피점령국의 주요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스스로 시작했던 전쟁이었고 식민지와 점령지의 독립을 탄압한 가해자 신분에 다름 아니었지만, 1945년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해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으며 이때 오묘하고도 불합리한 심리적 치환이 발생합니다. 전쟁의 가해자가 일순간에 원폭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히로시마 원폭은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낳은 참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라는 국가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자였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일본은 패전 이후 세계대전에 대한 대외적 책임을 지고 육해공 전력을 보유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이 자국의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경찰 예비대를 창설했고 그것이 현재는 자위대라는 명칭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1947년에 시행된 일본의 평화헌법에는 국가간의 교전권 포기와 어떠한 전력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평화헌법의 정신과 배치되는 형태로 1950년대 이후 계속해서 자위대의 전력을 확충하고 1990년대부터는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집단자위권 행사 등의 명목으로 헌법을 바꾸면서까지 명실상부한 일본의 군대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방안을 검토해 왔습니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자위대 편)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만을 담당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자위대, 이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성벽의 역할과 묘하게 닮아 있지요. 성벽(자위대)은 보호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진격의 자유를 막는 감옥이기도 합니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성벽(자위대)의 보호 기능에 대해서 자국민의 신뢰가 지나치게 강해졌으나 이 믿음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는 경고입니다. 진정한 평화 유지를 위해선 자위대가 자국을 방어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며, 적극적 공격권과 강력한 공격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들 자신의 눈에 비춰진 "작은 일본", "피해자인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죠.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당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거인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용맹한 훈련병단에 자원입대하라고 속삭이는 것이지요. (참고로 일본의 자위대는 모병제로써, 징병제인 우리나라와 달리 18세 이상 27세 이하 일본 국적의 남성들이 자원입대해야만 병력 유지가 가능합니다)

사실 일본이 과거에 전쟁을 일으켰었다는 이유만으로 영구적으로 군대가 아닌 자위대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일본과 함께 2차대전의 주축국이었던 독일도 현재 자국의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헌법 9조는 일본의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전쟁할 권리인 교전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하고 있었으나, 최근 아베 내각이 출범하면서 이 헌법 9조를 개정하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승격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이에 주변국들은 술렁이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2차대전을 일으켰던 독일과 일본, 그 둘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것일까요?

독일과 일본이 자신들의 과거 침략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일본이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승격시키겠다는 주장에 주변국들이 왜 그리도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국가는 전쟁 이후에 정반대의 다른 방향으로 달려 왔기 때문이지요. 독일은 과거에 자국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끊임없이 사죄해 왔습니다. 일례로 독일의 2차 대전 패망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당시 독일연방공화국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과거 나치 독일이 저지른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만행을 조금도 미화함 없이 후세대에 전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이와 같이 독일은 전후에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인정했고, 학생들의 역사 교육까지도 이를 반영했지요. 가천대 명예 총장으로 계시는 이성낙 님께서는 신문에 기고하신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계십니다.

"1960년대 초 독일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독일 친구들이 나치 과거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을 느꼈다. 자기들의 ‘아픈 과거사’라 그러려니 했다. 몇 년이 지나 비슷한 계기에 독일 친구가 역시 같은 반응을 보여 조용하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전후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나치 독일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워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필자는 6·25 동란사를 분명 고교시절 역사시간에 배웠기에 더욱 의아해했다.

수년 전 바로 그 친구에게 요즘도 독일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나치 독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왜 아니 배우겠냐고 놀라워하기에, “오래전 네가 학교에서 나치 만행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그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역사교육 담당 교사들은 필연적으로 나치 시대를 몸소 격하게 체험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치 관련 역사를 학생들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교육당국이 정책적으로 현대역사를 교육목록에서 아예 배제했다”고 설명했다.

실로 참신한 교육의 역동성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사에 대한 독일 국가와 국민들의 철저한 반성의지를 향한 공감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 국민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심이 있었기에 화려한 수사에서 끝나지 않고 범국민적 반성이 따를 수 있었겠다는 사실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독일에서 나치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며 아직까지도 독일 정부는 전범 관련자를 찾아내 재판에 회부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이 욱일승천기를 들고 거리낌없이 거리를 활보하며 심지어 정치인이 앞장서서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일본이 틈만 나면 외적으로는 군비를 증강하면서 문화적으로는 이런 만화를 제작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참 씁쓸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색안경을 끼고 보면 정치적인 색채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들 가운데 아이언맨이나 배트맨과 같은 영화들은 공화당의 이념을 담고 있으며, 공공연하게 미국 군수업체들의 투자를 받아 제작되는 헐리우드 영화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자국을 더 멋지게 보이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할 수 있는 만화를 만듭니다. 저는 그걸 욕할 마음도 없고 그런 작품들을 수입하지 말자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며 제가 상관할 바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제 '숨은그림찾기'를 다른 분들께 강요할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우리 역사에 대한 뚜렷하고 올바른 역사관만은 부디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무분별하게 타국의 문화와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관점을 계속 접하다보면, 조금씩 동화됩니다. 일본인들이 일본인의 관점에서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 나름의 "애국"이며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이 일본인의 역사의식과 관점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참 무서운 일입니다. 역사에 있어서 객관적 관점이란 절대 없으며, 숨겨진 뜻이 없는 작품은 단연코 없으니까요.

수용미학(受容美學)에 따르면, 텍스트는 독자와의 상호작용으로서 읽혀지는 과정에서 완성된다고 합니다. 즉,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인지되고 이해될 때에 그것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므로 작품의 은유가 뜻하는 바 역시도 무엇이 정답이라고 어느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진격의 거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의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면 됩니다.

"진격의 거인"은 아직 완결도 나오지 않은 작품인데다 포스팅의 주제 자체가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이라 이 글을 적을까 말까 고민도 했지만, 그냥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야스쿠니 신사가 뭔지 아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신사/숙녀 할때의 그 신사가 아니냐고 답하는 고등학생의 인터뷰를 보면서 제가 감정적으로 욱해진 탓도 있을 거에요. 부디 너른 마음으로 저의 치기 어린 포스팅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저는 파시즘이나 민족주의에는 관심도 없고 그런 방향을 갖자는 것도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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