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작물을 키울 때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씨앗을 땅에 직접 파종하여 바로 키우는 방법과 모종 상태로 구입하여 심는 방법으로 나뉘지요. 올해 초, 봄에 방울토마토 모종을 구입하여 발코니에서 대박 성공을 거둔 저는 다소 거만해진 나머지 ‘이 까이꺼 대~애충 씨앗 툭툭 심어도 모종 없이 얼마든 잘 키울 수 있거덩!’ 하면서 이마트표 씨앗으로 바질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캬! 므찌당! 쿨내 진동!!)
하고많은 농작물 가운데 왜 하필 바질이었냐구요? 바질 농사, 그 처음의 시작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당시에 케이블TV에서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뚝딱뚝딱 손쉽게 만들며 영국 특유의 억양으로 ‘Lovely’를 외치던 제이미 올리버가 아주 사랑하던 허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바질(Basil)이었습죠. 앞 뜰에서 대충 따온 바질을 그가 스파게티에 쓰윽 집어 넣고서 ‘이거 정말 짱이양!!! 오~ 롭을리!! 후루루룩~챱챱!!’ 그때 그는 진정한 원조 요섹남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기 요리에 심취해 너무 잘 잡수셨는지 나중엔 그냥 땡글땡글한 동네 아쟈씨의 비쥬얼로 역변했으나 여하튼 그 분의 쿡방+먹방을 TV로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저의 아밀라아제도 폭발했어요!! 그리하여 다짐했습니다. 바질을 키워서 무심한 듯 스파게티에 툭툭 꺾어서 넣는 저거! 훗날 나도 꼭 해보고 말 테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어느 날, 방울토마토 농사로 그린썸의 재능을 발견한 - 아니 발견했다고 착각한 - 저는 바질 씨앗을 화분에 거만하게 파종하게 됩니다. 허세남 최현석 쉐프의 소금뿌리는 듯한 자세로 솨아악.…! (읭??-_-???) 여기에서 잠시 그린썸(Green Thumb)에 대해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채소나 식물, 화초 같은 것들을 심어서 가꾸는 재능을 뜻한답니다. (라고 영어 사전에 적혀 있…쿨럭!) 그리하여 심어둔 바질 씨앗은 며칠 지나자 아주 어여쁜 연두색 새싹을 드러내며 그 귀여운 얼굴을 살짝 보여주었어요. 그래요! 역시 난 그린썸을 가진 천재농사꾼이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나의 작고 귀여운 바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위로 쭉쭉 자라기는 하지만, 비리비리하게 가늘게 위로만 뻗어가는 모습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못하더군요.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었을 당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었던 당시엔 줄기도 꽤 두껍고 잎도 탄탄하고 참 건강한 모습이었거든요. 그런데 왜 씨앗으로 심은 첫 번째 작품인 바질은 이다지도 비루한 모습으로 키만 커지는 건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마트에서 파는 씨앗은 Basil(바질)이 아니고 Bisil(비실)이었던 거냣!!??
그런데 허무할 정도로 답이 참 쉽게 나왔습니다. 우리 엄니 왈, 화분에서 싹을 틔우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농지에 파종을 하면 흙도 많고 공간도 넓고 영양분이 많으니 탄탄하고 크게 자랄 수 있지만 작은 화분에서는 원래 농작물이 비루한 모습으로 깡총하게 큰다는 겁니다. 완효성 비료와 건강한 모종의 도움을 얻어 방울토마토를 성공적으로 키웠던 저는 뿌리내릴 공간이 비록 부족하더라도 영양분만 충분하다면 바질도 손쉽게 키울 수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씨앗이 건강한 나무로 자라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영양분과 물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씨앗이 싹을 처음 틔울 때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드넓고 대지의 햇빛이 잘 드는 비옥한 농지에서 씨앗이 싹을 틔우면 아기 새싹이 자신의 한계를 속단하지 않고 마음껏 뿌리를 뻗으며 튼튼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겠지만 비좁고 척박한 우리 집 발코니 화분에서는 아기 새싹이 오로지 생존에만 집중하니 허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자랄 수 밖에요.
그런데 비단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 역시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굉장히 중요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단지 생존 만을 위해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창대한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인가는 바로 어렸을 때 어떤 것을 경험하고 무엇을 듣고 뭘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요? 어렸을 때에 큰 세계를 경험하고 나의 미래의 모습들을 근사하게 그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양한 도전을 서슴지 않는 큰 사람이 되겠지만, 작은 화분 속에 가로막혀 있어서 그저 적은 흙으로 비좁은 공간에서 아등바등 살아남아야 하던 사람에게 세상은 참 각박하고 무서운 곳입니다. 그가 설령 뒤늦게 넓은 곳으로 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 속의 세계는 그 작은 화분이 전부이고 그의 삶의 목적은 단순히 ‘살아 남기’일 테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화분 속 바질은 아마도 더 크게 되길 기대하기란 힘들 거란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슬프긴 하지만 시작점이 다르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쓸데없는 농작의 수고를 그만 기울이고 뽑아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살아있는 것을 뽑기는 미안했고 볼품없이 웃자라는 것만이라도 막아보자는 생각에 바질 가지의 위쪽을 가위로 조금씩 잘라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잎사귀들을 갖고 집안으로 들어 왔지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볼품없고 여린 바질의 잎사귀에서 신기하게도 향긋하고 기분 좋은 바질 향이 진동하는 거에요. 저의 공간을 파릇하게 가득 채울 만큼의 향기였습니다.
시작하는 지점이 달랐기에 크게 될 수 없는 나무라고 제가 속단했던 미생조차도, 그의 본질과 가치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작은 녀석은 단순히 본질만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었고 자신의 생기 돋는 향기로 제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어릴 때 경제적인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역경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 별볼일 없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건 아닙니다. 남들보다 수십 갑절의 노력이 필요하긴 하겠으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될 수 있고, 타인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시련을 겪는다 해도 한계를 속단하지만 않는다면, 스스로의 본질을 지키며 훨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어린 바질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최근에 신문을 보면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를 넘어 n포세대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더니 주택마련과 인간 관계도 포기하고, 그걸로 모자라 희망과 꿈, 급기야는 인생의 모든 n가지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까지 나온 셈입니다. [포기] 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 2. 자기의 권리나 자격, 물건 따위를 내던져 버림.] 이라고 나옵니다. 이 두 가지의 사전적인 의미는 절묘하게 서로 통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 버리게 되면, 결국 우리의 권리나 자격은 내던져 버려지고야 만다는 뜻 아닐까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남아있지 않은 비좁은 화분 속, 슬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주려는 듯, 지금도 작은 바질은 우리 집 발코니의 화분 한 켠에서 치열하게 힘겨운 자신만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P.S. 글의 제목을 적어놓고서 소리 내어 읽어 보니 약간 므흣-_-;;합니다. 바질, 포기하지 마? 너 지금 바지를 포기하지 말라는 거니...???!!! 아니 아니~~ -_-++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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