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하루는 아침 등교시간에 굉장히 붐비는 만원 버스를 탔습니다. 학교 앞 정거장에 거의 도착해서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문 앞으로 겨우 나왔지요. 그런데 워낙 북새통이라 제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버스 문이 닫혀 버렸고, 버스기사가 서둘러 차를 출발하려 하는 겁니다. 뜨악!!!!!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어서 내려야 하는데 말이죠! "Excusez-moi! Ouvrez la porte, s'il vous plaît. (실례해요!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라고 외치려고 하는데 제 소심한 "Excusez"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저의 절박한 표정과 내리려는 몸짓을 힐끗 본 어떤 남성이 정말 우뢰와 같이 큰 목소리로 "La porte!(라 포흐뜨)", 우리 말로 하면 "문"이라고 버스기사를 향해 외치는 겁니다. "실례합니다" 라든가 "~해주시겠어요?" 뭐 이런 말도 필요 없었고 그냥 문! 이라고 외친거죠. 그런데 버스기사가 정녕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고픈 건지 그 소리를 무시하고 출발하는데 이번엔 또 다른 여성이 다시 외쳤습니다. "La porte!!!!" 그들 덕분에 출발했던 버스는 결국엔 다시 세워졌고, 다행히도 저는 버스에서 내려 학교 수업시간에 잘 도착했습니다.

이때 정말 중요한 두 가지를 배웠는데, 하나는 프랑스에서 버스 문을 열어 달라고 할때는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La porte라고  외치면 된다는 것. ^^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절박한 소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열린 마음을 가진 다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버스를 내려야 했던 사람은 사실 저 하나밖에 없었으니 저 혼자만 희생하고 그냥 버스가 출발했다면, 다수의 승객들은 목적지에 아주 조금은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면하지 않았고 저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 주었으며, 아주 사소한 도움이었으나 저는 그들에게 진정 감사했고 감동했습니다.

사실 그때껏 살면서 저는 아주 많은 순간에 소수이기보다는 다수였고, 비주류이기 보다는 주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절실히 부탁할 일도 별로 없었고, 도움을 필요로 한 적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보호 받았기에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지요. 소수는 대의를 위해 희생될 수 밖에 없다고 제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은연 중에 마음 속으로 그리 믿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머나먼 타국의 다소 엉뚱한 상황에서 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소수자가 덜컥 되어 버렸습니다. 국적에서의 소수자, 인종에서의 소수자, 언어의 소수자, 게다가 버스에서 당장 내려야 하는 단 한 명의 버스하차 소수자... 그 후로 인생을 살면서 어떤 중요한 사실에 조금씩 눈뜨게 되었지요. 흔히들 말하는 효율성이나 자유, 다수결이 전부가 아니며, 그것들 만큼이나 꼭 지켜져야 할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말입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나무꾼이 나무들을 찾아와 부탁했습니다. "내 도끼에 맞는 나무 자루를 얻고 싶소." 나무꾼의 제안은 매우 조심스러웠지요. 그래서 몇몇 중요한 나무들이 신중하게 논의를 거듭한 끝에, 가장 볼품없고 초라한 물푸레나무를 제공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나무꾼은 그 물푸레나무 토막을 잘 다듬어 도끼 자루로 만든 다음, 본격적으로 나무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사방 팔방으로 마구 후려쳤고, 심지어는 숲의 가장 훌륭한 나무들까지도 마구 쓰러뜨려 버렸지요. 이에 떡갈나무가 히말라야 삼나무에게 말합니다. "최초의 양보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나무꾼의 제안을 거절해서 저 친한 동료를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텐데..." 

오늘 우리는 한국 사회라는 이름의 버스 안에 올라타 있는 수많은 승객들 중 하나라서, 다른 한 명의 승객을 희생시키고 버스가 그냥 출발하더라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 자신이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그 단 한 명의 절박한 승객이 될지도 모르고, 숲 속의 볼품없는 물푸레나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과연 "나"라는 한 사람의 권리를 위해 과연 목소리를 높여 버스문을 열라고 외치거나, 그 물푸레나무를 베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까요? 때로 일부의 희생이 당연한 것인양 말하고, 그들이 받는 피해는 그 희생자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된 결과일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를 향한 부당한 차별,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에서 생기는 불합리한 폭력, 비주류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불평등에 대해 오늘 내가 침묵하거나 또는 동조하다보면 훗날에는 우리 자신이 "다수"의 눈에 불편한 존재가 되어 단죄의 대상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작은 목소리들을 위해 크게 외쳐 주세요. 차별받거나 희생되어야 할 대상자를 우리 인간들 중 그 누가 감히 결정할 수 있을까요? 어떤 기준으로요? 어떤 잣대로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judge)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7:1-2)" 우리가 타인을 심판하고 그들의 희생에 침묵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심판과 차별,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마틴 니묄러 목사가 쓴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 교도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전 어릴 적에 이런 저런 이유로 부모님께 잔소리들을 종종 듣곤 했습니다. "초록별! 너 오늘 등교할 때 횡단보도에서 손 안 들고 건넜다면서?", "동네에서 어른들을 보면 인사를 잘 해야지!", "숙제는 미리 미리 해야지!" 등등. 어떻게 우리 엄마는 그런 시시콜콜한 내용을 모두 다 알까 싶을 정도로 제 일거수 일투족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워낙 아빠를 꼭 빼닮아서 길을 가다가 "너 혹시 ***씨네 아이 아니니?!"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제 붕어빵 외모도 부모님의 스토킹(?)에 한 몫을 했으리라 봅니다. 

그 시절엔 그런 '부모님표' 가르침들이 참 성가시게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내용들이 사소하지 않으며 매우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언컨대, 저희 부모님은 제게 참 훌륭한 스승님입니다. 평소의 행동가짐에 대한 부분부터 인간 관계, 직업관, 인생관까지 다양하고 진솔한 가르침을 주시니까요. 물론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유려한 문장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소탈하고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들을 해주시곤 합니다. 잘 따르지는 못할 때가 많지만,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도록 잘 적어두어 마음에 새기고픈 욕심에 글로 적어 둡니다.

1. "쓸데없는 자랑은 삼가라": 삼가라는 것은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며, 꺼리는 마음으로 양이나 횟수가 지나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요즘은 자기 PR의 시대이니, 적절한 수준의 자기 홍보는 필요하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려니와, 이유없는 시샘을 불러 오기 쉽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이니, 좋은 일이 있을수록 더욱 겸손하게 행동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굳이 자랑을 꼭 하고 싶다면, 그 날은 반드시 네가 베풀어라": 네가 자랑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날 밥은 반드시 네가 사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남이 잘되는 건 배가 아픈 법이다. 축하 받을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베풀어야 상대방에게도 진심어린 축하를 받을 수 있다. 네가 잘되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생겨야 한다. 작은 것을 아끼자고 괜한 시기나 질투를 사지 마라. 너의 성공을 기뻐하고, 축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3. "작은 나무는 큰 나무 그늘에서는 클 수 없지만, 사람은 큰 사람 옆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다": 소위 잘 나가는 사람 옆에 있다보면, 간혹 힘든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 사람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때론 손해 보는 경우가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꿋꿋이 참고 그의 옆에서 배워라. 네가 그 사람 만큼 성장할 때까지 그가 네 곁에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4. "약게 굴지 마라": 가까운 앞날 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만 이롭게 꾀를 부리는 사람은 크게 되지 못한다. 어리숙해 보일지라도, 착하고 정직한 것이 낫다. 짧게 바라보면 꾀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마치 많은 것을 얻는 양 느껴지겠지만, 그들이 얻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며 더 크고 소중한 것들을 오히려 잃게 될 것이다. 영리하면서도 선하면 가장 좋겠지만, 굳이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선한 것이 우선이다. 타인의 고통에 기반을 둔 일로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

5.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현재의 직업에 안주하지 말고,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일을 한다는 것은 경제력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과 인간 관계 면에서도 참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미리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는 시기는 안정된 직업과 서로 겹치는 기간이 필요하다. 하나를 끝마치고 다른 하나를 시작하려고 하지 마라. 안정된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는 조급함 때문에 쓸데없이 서두르게 되어 일을 그르치게 된다.

6. "자신의 판단력을 과신하지 마라": 사업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게 될 때에 스스로의 안목을 지나치게 믿지 마라.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 어떤 이들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기 때문이다.

7. "타인을 미워하는 감정에 휩싸이지 마라": 네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그건 네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 뿐이다. 네가 그를 미워한다고 해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 마음만 지치게 될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미워하지 마라.

8.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겨라": 친구를 사귀는 것도 때로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나는 것이 때로는 귀찮다 할지라도, 만남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라. 나이가 들면 인생이 무료해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 온다. 이때엔 경제력 만큼이나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해질 것이다.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친구가 꼭 필요하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상대를 진심으로 기쁘게 맞아주는 것,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모든 것이 교제의 일부분이다.

9. "건강을 소중히 여겨라": 평소 건강 관리에 신경 쓰고, 몸이 안 좋다고 느껴지면 지체하지 말고 병원에 가라. 초기 진찰을 미루다보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다. 한 군데 병원만 가서는 안되고, 여러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봐야 한다.

10.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라":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외적으로도 외모에 항상 신경 쓰고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맹수의 왕 호랑이도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내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외적인 부분 가운데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섬세하게 신경써야 한다.

이 글을 적게 된 이유는 부모님 말씀을 잘 기록하여 마음 속에 새기고 기억하기 위함도 있지만, 인생을 잘 사는 비법을 가르치는 거창한 서적들에 대한 회의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정말 미친듯이 사서 읽었던 자기계발서가 조금씩 싫어지더니, 이젠 그걸 읽다 보면 참 슬픈 마음이 들곤 합니다. 직장 생활에서 성공하는 XX가지 비결이라든가,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비법이라든가, 소위 잘나가는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들을 알려주시는 자기계발서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거든요.

그들이 말하는 내용 안에는 "성공을 위한 이런 이런 방법들이 있어! (= 네가 지금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이런 이런 방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지!)" 라는 기묘한 등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걸 모르던 때에는 그들의 방식을 모두 따르지 못하던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만 했는데, 이제 보니 단순히 제 탓 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 책을 지은 분들이 일부러 그렇게 적은 것은 아니겠으나 은연 중에 그분들은 용기를 준다는 명목 하에 자신을 Winner로 묘사하면서 독자를 심리적 측면에서 Loser로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모든 자기계발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제가 부모님의 조언을 들을 때 편안한 이유는 이야기의 서두나 말미에는 늘 이런 말이 붙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렇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엄청나게 잘난 인간이라서 건네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오래 살아보니 내가 사랑하는 우리 딸들은 이렇게 인생을 살면 좋겠다 라는 작은 바람을 갖고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녀의 성장을 위해 진심을 다해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듣는 이의 마음에 더욱 따뜻하게 와닿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생에 관한 훌륭한 조언들은 대부분 부모로부터 아들, 딸에게 이어지는 형태가 되나 봅니다. 성경 속의 잠언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참된 지혜의 이야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가족끼리의 이야기이니 부모 입장에서도 거창하게 꾸밀 필요도 없고, 자녀 역시 그 이야기를 상대의 거만함으로 받아 들이기 보다는, 인생의 조언으로 마음을 열고 들을 수 있으니까요.

모든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자신만의 언어로 가르침을 주십니다. 자기계발서를 이제 덮고서 부모님의 말씀에 잠시 귀기울여 보세요.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그러나 오직 당신을 위해 진심을 갖고 전해주고자 하는 그분들만의 지혜가 분명 숨겨져 있으실 것입니다. 열심히 귀기울여 들으시고 제게도 그걸 이야기 해주세요. 여러분 부모님의 잠언은 어떤 내용입니까?

몇 년 전 말간 하늘빛을 닮은 정말 예쁘고 동그란 돌 두 개를 우연히 갖게 되었습니다. 그 색깔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을까요. 하늘이 조금씩 녹아서 투명한 돌에 그 색이 물든 것 처럼 푸른 파스텔톤이었죠. 게다가 손에 쥐고 있으면 차갑지만 매끈하게 한 손에 잡히는 촉감이 너무 좋아서 마음까지 포근해졌어요. 가끔 그 돌맹이 두 개를 달그락 거리며 쥐고 있으면 지구의 한 조각을 잡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수백 수천년 전에 이 하늘색 돌은 광활한 지구의 어딘가에서 생겨났겠죠. 물론 지금은 제가 잠시 갖고 있지만 제가 죽고서도 수백 수천년동안 이 돌맹이는 또다시 영겁의 시간동안 아무렇지 않게 이 땅 위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보니,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던지... 이 세상에 온전히, 그리고 영원하게 나만의 것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요? 나의 하늘색 돌, 나의 마음, 나의 몸, 그리고 나의 사랑조차도 애초에 나만의 것이란 건 없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너무 공허했습니다. 조금은 슬프고 우울해졌지요.

결국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언젠가 그것을 잃게 된다는 걸 전제합니다. 애초에 갖지 않았더라면 잃게 되지도 않았겠지만, 일단 가졌던 것들은 또 언젠가는 놓고 가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게 인생이니까요. 슬프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 오늘이 참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기에 오늘이 더 가치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이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수많은 것들을 떠올리다가 끄적여 봅니다.

여자들의 수다에는 참 다양한 주제들이 오가곤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증권가 찌라시에 나온 모 연예인에 관한 소문, 요즘 패션 트랜드, 어제 본 드라마까지 말이죠. 그 중 단골 소재는 '나쁜 남자' 이야기입니다. 친구의 친구가 결혼을 했는데, 신혼 첫날에 남편이 부인을 때렸다더라, 친구의 애인이 천인공노할 나쁜 짓을 했는데도, 친구는 그 애인을 용서했다더라...등등...

참 딱한 사연도 있고, 너무 엽기적이라 개그나 드라마 소재에 가까운 이야기도 있어서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신나게 듣다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면서 의아한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왜 헤어지지 않는걸까? 그녀들의 머릿속엔 무엇이 있기에 그런 형편없는 남자에게 빠져서 지독한 사랑의 열병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걸까? 정작 착하고 한결같은 남자의 가치는 왜 과소평가 받는걸까? 소위 "나쁜 남자 (또는 나쁜 여자) 신드롬"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곰곰히 이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대학시절에 들었던 강의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아동 심리학 수업이였는데, '강화'에 대한 부분이었지요. 사람의 행동이 반복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어떤 행동을 했을 때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착한 행동을 했을 때에 칭찬을 해줌으로써, 계속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되도록 강화시키는 것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스키너는 이를 동물 실험에 접목하여, 생쥐의 먹이 상자 옆에 지렛대를 만들어서 그걸을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장치를 설치했는데요. 지렛대를 누르는 행동에 먹이라는 보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렛대를 누르는 행동이 강화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했지요. 이게 그 유명한 스키너상자입니다.

그런데 이 실험의 조건들을 약간씩 변형해서 적용해보던 학자들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강화 효과는 규칙적으로 보상이 일어날 때보다 간헐적으로 보상이 이루어질 때에 더욱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가령 쥐가 지렛대를 한번 누르면 먹이가 한알씩 규칙적으로 나오는 방식으로 강화시키는 것 보다는, 어떨 때엔 세번 누르면 먹이가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엔 한번 만에 먹이가 나오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열번을 누르니까 먹이가 나오기도 하는 방식으로 강화를 시키면 그 습관이 잘 없어지지 않더라는 말이죠. 이를 간헐 강화 (intermittent reinforcement)라고 부르는데, 의외성이나 불규칙성 때문에 대상에 대해 싫증이 덜 나게 되고 중독성이 없어지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더라는 것입니다.

간헐 강화에서의 핵심은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보상이 주어질수록 강화 효과가 크다는 점입니다. 지렛대를 누르다 보면 언젠가는 보상이 나올 것 같다는 환상에 빠져 계속 지렛대를 누르고 있는 생쥐의 모습....어디서 본 것 같지 않으세요? 맞습니다. 카지노에서 대박을 기대하며 슬롯머신을 돌리는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먹이상자에서 먹이가 나오길 기대하며 끊임없이 지렛대를 누르는 생쥐의 까만 눈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또한 대어의 환상에 취해 밤새 낚시질을 하는 낚시광들의 모습도, 정기적인 급여보다 PS(Profit Sharing) 나 PI(Productivity Incentive)에 열광하는 직장인의 모습도 사실은 간헐강화의 결과물입니다.

그럼 이제 나쁜 남자 신드롬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나쁜 남자의 핵심 포인트는 "나쁜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번씩 잘해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매일 잘해주던 남편이 어쩌다 한번 짜증을 내면 배우자는 굉장히 분노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짜증을 내던 남편이 어쩌다가 한번 귤 한 봉지를 사들고 오면 부인은 감동합니다. 나쁜 남자가 그걸 계산하고 한 행동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든 간에 상대방은 이미 그 나쁜 남자의 간헐적인 보상 방식에 '중독'됩니다. 착한 남자가 '매일 매일 먹이 한알' 방식의 일률적인 보상을 하는 동안에 소위 밀땅 잘하는 나쁜 남자는 '먹이 주는 건 내맘대로'라고 하면서 상대를 휘어잡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나쁜 애인, 또는 나쁜 남편, 나쁜 아내가 진정한 승자이고 심리학의 귀재이며 모든 사람들의 열망의 대상이 되나요? 아니죠. 이상하게 나쁜 남자에게 쉽게 당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당하고, 다음 사람에게 또 당하고, 다음 번에 또다른 남자에게 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어쩜 그렇게 자꾸 당하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적당히 당하면 만나지 말아야 할텐데 포기하지도 않고 계속 나쁜 남자에게 매달립니다.

그녀들이 나쁜 남자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심리적인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저는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로 자신이 들인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입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더욱 광적으로 종교활동에 심취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게, 그녀들은 자신이 '어리석게 나쁜 남자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그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더욱 더 나쁜 남자에게 매달립니다.

두번째로 그녀들은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초기에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당한 선을 벗어날 정도로 상대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이를 제지하여 관계의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초기에 그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더라는 거죠. 상대방이 용인되는 행동 이상의 잘못을 하면 단호히 대처해서 그 행동을 고치든가, 정 고쳐지지 않으면 이별을 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인격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A라는 사람에게는 천사표였던 사람도, B라는 사람에게는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서 좋은 인품을 이끌어 내는 것도 일종의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대개 자존감이 낮은 여성들이 나쁜 남자에게 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성들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습니다. 어릴 때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했다거나 자존감이 너무 낮은 경우엔 "내가 못나서 그런 대접을 받는 건데, 어쩔 수 없지" 라고 자포자기 합니다. 반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과소평가를 당하게 되면 "내 가치를 모르다니, 넌 참 멍청해. 난 훨씬 더 가치있는 사람이니,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상관 없어" 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이별을 택하지요.

그러니 이제 나쁜 남자는 만나지 마세요. 남들에게는 참 다정한데, 당신에게만 나쁘게 굴던가요? 그럼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어쩜 당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라요. 또는 당신이 그 사람의 좋은 인격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당신과 그는 화학적으로 안 맞는 것일지도 모르죠. 여하튼 어떤 쪽이 되었건 자신을 형편없게 대하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마세요. 흔한 광고 카피처럼 당신은 소중하니까요. 이젠 스키너의 상자에서 탈출해서, 간헐 강화의 지독한 중독에서 벗어나세요. 가끔 당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고 항~상 잘해주는 사람을 만날 자격이 당신에겐 충분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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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님! 애니팡 해보셨어요?"

응? 애니팡? 그게 뭔데?? 가로 또는 세로로 똑같은 그림을 세 개 맞추면 점수가 올라가는 게임인데, 카카오톡에 등록된 사람들끼리 순위 경쟁도 할 수 있어서 요즘 인기 많은 게임이라는 설명이 이어 집니다. 세개의 그림을 맞추는 게임들은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던 단순하고 흔한 게임인데 그런 게 요즘 인기가 많다니... 그럼 나라고 빠질 수야 없지!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플을 다운 받아 시작합니다. 카톡에 등록된 지인들의 순위가 주르륵 뜨는 것으로 보아, 정말 요즘 핫한 어플이 맞긴 한가 봅니다. 몇 번 하다보니 순위가 바뀌었다는 메시지가 뜨고, 한단계 한단계씩 순위가 올라갈 수록 이유없는 승부욕에 불타 그날 밤 1시까지 눈을 비비며 열중했죠!

그리고 다음 날도 퇴근을 하고서 다시 애니팡에 접속하여 게임을 하려다가 문득 궁금해 졌습니다. 정말 애니팡을 잘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으아...이기고 싶다. 내 바로 위에 랭크된 대학원 시절 친구를!!!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네이버 검색창에 애니팡이라는 말을 넣었죠. 굉장한 것은 애니팡 이라는 말을 검색창에 넣자마자 '애니팡 고득점 방법'이라는 자동완성기능의 검색어가 떡하니 뜨더라는! 그 비법을 나만 궁금해 할 리는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뭐 콤보를 많이 해야 한다는 둥, 콤보를 많이 했을 때 폭탄을 터뜨려야 고득점이 가능하다는 등등의 비법들을 전수받고 있었습니다. 무릎을 치면서 '아싸~ 난 이제 곧 애니팡 고수가 될껴!'라고 김칫국 1.5리터 3병쯤을 마시고 있었죠. 다른 고급정보가 없나 하고서 다시 네이버 메인창을 띄웠는데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네이버 메인창에서 추억의 '그 게임'의 배너광고를 마주한 것은요.

그 게임은 이름하야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블리자드의 검은 손길에 이끌려 시작했고 2004년의 수많은 밤들을 하얗게 불태우게끔 만들었던 바로 그 RPG... ㅠ.ㅠ 그 아련한 추억 속 게임 WOW의 4번째 확장팩인 "판다리아의 안개" 광고가 모니터를 통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하아...첫사랑이 "나 기억해?" 라고 말하며 배시시 웃고있는 것 마냥 말이죠 (저 오른쪽의 광고 속 팬더가 웃는 걸로 보였냐구요? 거참! 이 사람이..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 지점에서 저는 잊고 있었던 사실 - 나는 굉장히 쉽게 게임에 중독되는 사람이라는 가슴 아프고도 부끄러운 기억 - 을 되살려 냅니다. 광랩 (빛의 속도로 레벨 업을 한다는 뜻의 게임속어)을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손가락 관절이 쑤시도록 몰두했던 것이며, 다음 날 출근을 하든 말든 새벽까지 미친듯이 던전을 방황하던 것, 나중엔 허리가 아파서 갖가지 요가 자세들을 취하면서도 밤새 게임을 계속 했던 것까지....

추억 속에 잠시 젖어 있던 저는 WOW계정이 아직 살아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로그인을 했다가 시간 정액제로 소액을 결제하고 말았습니다. 접속해보니 제가 키우던 캐릭터가 아직도 살아 (정확히 표현하자면 남아) 있음에 한번 놀랐고, 아이언포지의 길을 달려 가다가 그 길 모퉁이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한다는 것에 다시 한번 더 놀랐습니다. 추억의 옛 동네를 우연히 들러서 그 뒷골목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듯한 기묘한 그 느낌이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선 스마트폰에서 살포시 '애니팡'을 지웠지요. 정확히 어플을 다운 받은 지 24시간 만에 정신 차린 셈입니다. 애니팡이 WOW보다 덜 재미있는 게임이어서가 아니고, 또다시 헛된 무언가에 미친듯이 매달리는 자신을 마주하기 싫더라구요. 처음엔 즐거움으로 시작했던 것이 내 에너지, 내 시간, 내 열정을 야금야금 먹고 자라나 어느 순간부터 그 집념은 거대한 괴물이 되고, 나도 모르게 그것에 집착하게 되어 결국 영혼까지 그것에 잠식 당하게 되는 뼈아픈 경험은 한번 만으로 족하니까요. 이건 게임중독이든 일중독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중독의 공통된 특성인가 봅니다. 중독이라는 이름의 그 길을 다시 달릴 뻔했는데, 옛 추억이 저를 구해준 셈입니다.

"어제 밤에 하트 보내드렸는데 받으셨어요?" 애니팡을 소개했던 직장 동료가 방긋 웃으며 묻습니다. 아~하트!!!! 아깝다. 그거나 한번 받아보고 지울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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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which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 as a pathway to peace,

Taking, as Jesus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You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Your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You forever in the next.

Amen.

- written by by Reinhold Niebu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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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컴패션을 통해 제가 결연하여 후원하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라스미 입니다. 라스미는 수학을 잘 못하지만, 글쓰기는 좋아합니다. 그 아이는 가끔씩 제게 편지를 쓰곤 하는데, 인도어로 적힌 편지를 현지 봉사자가 영어로 번역하여 보내 줍니다. 반대로 제가 영어로 쓴 편지는 인도어로 번역되어 그녀에게 전달 되지요. 이렇게 오고 가는 편지를 통해서 그 아이의 형제 중 하나가 청력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라스미의 꿈이 선생님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 아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늘 그렇듯 연필로 꼭꼭 눌러 적은 그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 아래 번역된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습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Dear auntie"로 시작한 그 아이의 편지엔 라스미의 어머니께서 아프시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고, 라스미 어머니께서 고열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슬픈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인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실 정도면 많이 편찮으신 게 아닐지 걱정입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나는데, 제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더욱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그 아이는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희 엄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라고....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막막한 제 마음을 읽기라도 했듯이 말이죠. 편지를 잘 접어 놓고서 라스미의 어머니가 완쾌하시길 기도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모두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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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에제키엘서 제37장 1-10절)

성경 속에서 마른 뼈들이 되살아나는 장면은 강한 충격을 줍니다. 방금 죽은 사람도 아니고, 이미 말라버린 뼈들이 되살아나 엄청나게 큰 군대가 되다니요. 어지간한 판타지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 성경 속에 생생히 펼쳐집니다.

이미 희망은 사라졌고, 더 이상은 기대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좌절하고 있던 때에 전 우연히 이 성경 구절을 접했습니다. 정말 놀랐지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제게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말씀과 같았으니까요. 공포와 좌절 그리고 실의에 빠져 마른 뼈들로 가득한 계곡을 걷고 있는 제 자신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제게 묻습니다. "얘야...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니?" 그때 제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맙소사. 주님. 제게 왜 이러시는 거에요? 이미 다 죽다 못해 뼈까지 말라버렸잖아요! 저는요.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왜...왜 제게 이러시는거에요!?" 사실 그분께 화가 났다거나 이렇게까지 저를 몰아가는 상황에 분이 났다기 보다는, 유능하지 못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 제게 주님은 그 마른 뼈들이 거대한 군대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이 말씀을 접하고서 불가능도 가능케 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도 물론 생각했지만, 그보다 그동안의 제 태도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몇가지 좌절을 겪으며, 스스로의 무능함에 자책하고 굉장히 분개했습니다. 아직까지 실패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터라, 어설픈 자만심 때문에 최근의 좌절이 더 아프고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배웠고 늘 그렇게 믿어 왔는데, 현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자신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무능력 탓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노력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던가요? 모든 일의 성공엔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긴 하지만, 노력을 아무리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과주의는 우리 사회의 우울증과 자살율 급증의 원흉일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unfortunate person은 그저 불운한 사람을 지칭했었으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부(fortune)가 없는 상태 -unfortunate-는 단순히 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태만함이나 노력 부족에 의한 결과인 양 몰아 갑니다. 결국 모든 성공과 모든 실패의 책임이 이젠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성과주의는 그런 면에서 참 끔찍하게 어울리는 환장(!)의 짝꿍입니다.

사소한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엔 몰랐는데, 최근에 좌절과 실패들을 경험해보니 그간의 제 오만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이루었던 일들은 온전히 제가 잘나서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음을, 제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즘 겪었던 실패들도 그분의 뜻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크고 작은 기적들부터 손바닥을 뒤집는 정도의 사소한 행동에도 "제 믿음과 노력"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제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나 봅니다. 제 안의 강퍅한 마음을 바로잡는 길은 무수한 실패밖에 없다는 걸 그분께선 이미 알고 계셨을 테지요.

제 고집을 내려 놓고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집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글을 쓰는 며칠동안 기적과 같이 그동안 쌓여있던 문제들이 한순간에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바라고 기대하던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제게 가장 필요하고도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혀 다른 "그분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 그 안에 숨결이 깃드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이 지금 우리의 일상 가운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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