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언니네 뒷마당에서 키우는 수컷 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그 녀석이 암컷 길냥이와 사랑에 빠졌고 암컷이 임신을 하더니 작은 새끼 고양이까지 언니네 마당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답니다. 언니네 수컷 냐옹이가 자기 가족을 어찌나 끔찍하게 아꼈는지 지가 좋아하는 통조림 먹이까지 양보하더래요. 그러던 어느 날 뒷마당에 나가보니, 아이들 노는 작은 풀에 아기 고양이가 빠져 죽어있더랍니다. 그날부터 언니네 숫고양이가 어찌나 슬피 울어대던지 마음이 짠하더래요. 사실 언니네 숫고양이는 어릴 적에 중성화 수술을 시켜놓은 터라 불임이었기에 죽은 새끼는 자기 핏줄도 아니었는데...

냐옹이에게 닥친 비극의 3연타입니다. 가족을 잃은 것만으로도 슬픈데, 죽은 아기 고양이는 자기 핏줄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자기에게 새끼는 생길 수 없다니 말입니다. 언니네 냐옹이는 자신이 불임인줄 모르다보니 자기 새끼인줄 알고 그동안 그토록 잘해준 것 같대요. 아침드라마 소재로 딱 적당한 막장스토리가 언니네 뒷마당에서 펼쳐진 셈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사건은 현실이었다는 점과 고양이들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 그리고 막장 드라마보다 훨씬 슬프다는 점이죠... 

때로는 현실이 드라마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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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강진의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며, 설상가상으로 방사능 유출에 대한 공포까지 더해지고 있습니다. 재난 영화보다 훨씬 더 무섭고 절망적인 상황이지요. 이번 재난의 피해로 세상을 떠나신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빠른 재건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넘실거리는 쓰나미가 산처럼 밀려와 마을을 집어 삼키는 장면을 9시 뉴스에서 보면서 문득 저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혹시 지구의 보복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환경을 파괴시키고, 대지 위에 전쟁 무기들을 무자비하게 투하하다 보니 지구의 보복으로 이런 자연재해가 늘어나게 된 것은 아닐지 의구심을 품어 본 것이지요. 한참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저 역시 가이아 이론의 추종자가 될 지경입니다.

가이아 이론(Gaia 理論)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주장한 가설로, 1972년의 짧은 논문 〈대기권 분석을 통해 본 가이아 연구〉에 이어 1978년 저서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가이아(Gaia)란 고대 그리스인들이 대지의 여신을 부른 이름으로서, 지구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말이죠. 이것에 착안해서 러브록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대기권, 대양,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신성하고 지성적인 즉, 능동적이고 살아 있는 지구를 가리키는 존재로 가이아를 사용했어요.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단순히 기체에 둘러싸인 암석덩이로 생명체를 지탱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진화하고 변화해 나가는 하나의 생명체이자 유기체임을 강조합니다. 가이아 이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지구온난화 현상과 최근의 지구환경 문제와 관련해 새롭게 주목받았으며, 환경주의와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정말 어쩌면 지구는 일종의 생명체로서 능동적인 존재로 살아 있는 유기체일지도 모릅니다. 지구를 거대 생명체로 보고, 지구가 자기 존재의 합목적적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이 서정적인 이론은 기존 과학계에서는 비웃음을 사고 있으나 일반인인 제게는 묘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오늘날 지구의 환경 대재앙은 가이아가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복수극이라니 상당히 공포스럽기는 해도 그럴싸하게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가 되었건, 혹은 절대적 존재인 신이 되었든 그 엄청난 존재가 인간에게 분노하여 징벌한다는 식의 접근은 정말이지 *너무* 위험합니다. 인류가 A라는 죄를 지어서 B라는 벌을 받는다는 것은 누가 판단할 수 있나요? 창조주 이외에 그 누가 죄와 벌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자연 재해가 *죄에 대한 징벌*이라는 식의 접근은 여러 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섣부른 "인과 관계 규정"은 일부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너희들의 이러 이러한 잘못이 스스로에게 재앙을 불러왔다"는 식으로 규정하여 피해자를 가해자로 비난하는 동시에 자신의 행위나 사상을 정당화시킵니다. 정말 잔인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논리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거래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합니다. 왜 그분을 치사한 장사꾼 또는 치졸한 쫌팽이 쯤으로 간주하려 하는지 답답하고 슬프기까지 합니다.

자연은 값없이 희생하고도 한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지만, 동시에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 재해로 우리의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연 현상들은 지구의 탄생부터 반복되어 왔던 일입니다. 이러한 자연 현상들이 지구의 보복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가 자연에게 그간 자행해 온 잘못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나머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현상을 겪는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지진이 왜 생겨났는지 이유를 따지기 보다 우리가 스스로를 비춰보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요? 인류가 지금 올라타있는 현대 문명은 흡사 인도 신화 속에 나오는 "자간나트의 마차"와 같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며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그 마차 위에 올라 탄 우리는 조금씩 눈뜨고 있습니다. 이 마차가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나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는 걸 말이죠. 당신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각성하기 시작했다면, 자신이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시작할 때입니다. 종이컵 덜 쓰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세제 덜 쓰기...너무 뻔하고 흔하다구요? 뭐 어때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잖아요? ^^

P.S. 저는요. 죄책감 마케팅이 참 싫어요. 무슨 소리냐 하면, 환경을 그냥 사랑하면 되지 괜히 '너 땜에 이렇게 되었어! 부르르" 뭐 이런 식으로 죄의식을 증폭시키는 것들이 싫더라구요.... 그냥 지금까지는 먹고 살기 힘들었던 거니까, 60년대 70년대 그때엔 그 외에 다른 답이 없었던 것 뿐이죠! 앞으로 노력하면 되요. 즐거운 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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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을 했던 분들 가운데 프랑스 파리가 좋았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영어가 잘 안통하는 점을 꼬집는 사람부터 쌀쌀맞은 대접 때문에 짜증이 났다는 사람까지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여러 요인들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파리지앵들이 타인에게 약간은 무관심하고 약간은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처음엔 그들의 무심한 태도가 야속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하기는 커녕 굉장히 편하고 합리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상대를 무시한다기 보다는,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남의 일에 먼저 간섭하지는 않지만, 도움을 요청하면 적절히 응해 준다고나 할까요? 이들의 행동을 얼핏 보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개인주의적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습니다.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타인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라면, 개인주의는 각자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니까요.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신, 똘레랑스(tolelance)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타인의 생각이나 주장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너의 생각, 너의 정치적 성향, 너의 가치관, 너의 성적 지향성, 너의 종교가 나와는 다르더라도 내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그것을 존중하겠다는 자세죠.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관용의 표현이기도 하며, 나의 권리만큼이나 네 권리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발로입니다.

'사회적 연대'를 의미하는 솔리다리떼(solidarité)는 똘레랑스 정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축입니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거나 지지할 의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프랑스인들이 파업을 대하는 자세도 조금은 우리네와 다릅니다.

어느 날인가 등교길에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다가 다음 역에서 모두 내리라는 안내방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파업으로 인해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니 다음 역에서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을 타고 가라는 겁니다 -_-;; 이런 퐝당 씨추에이션에 사람들이 주섬주섬 자기 짐을 챙겨 들고서 별 군소리 없이 다음 역에서 내립니다. 파업이 빈번한 탓도 있겠으나, 타인의 파업할 권리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마르세이유 여행을 혼자 계획하다가 현지 교통노조 파업으로 인해 여행일정 자체를 취소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마르세이유 여행을 못 간 것은 무지 아쉽지만, 일종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인이 모두 *좋은 쪽의 개인주의자*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자는 건 아니며, 그네들의 사상이나 이념이 우월하다는 뜻도 전혀 아닙니다. 다만 미국식 성과중심의 자본주의나 우리네의 "국가가 잘되야 국민이 잘산다"는 집단주의 사고가 유일한 정답은 아니라는 거죠. 조금은 덜 효율적일지 모르겠으나, 집단의 발전이나 이해 관계를 이유로 일부의 희생이 마치 당연한 것인양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자본주의를 사랑하는, 그래서 어쩌면 살짝 우편향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체가 잘되려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가끔 소름이 돋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평생 주류에 속할 것이라는 극도의 오만함을 떠벌리는 것 같아서요.  지금 우리가 짓밟은 타인의 권리는 물푸레나무 도끼가 되어 우리 자신의 발등을 찍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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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 받아 들이던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항상 쓰던 "가래떡"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가래+떡으로 보여 상당히 더럽게(-_-;) 느껴진다거나, 친한 친구의 얼굴이 생판 남처럼 보인다거나, 내가 즐겨 입던 겨울코트가 문득 몸서리치게 촌스러워 보인다거나...

언제부턴가 제 눈에 이 사이트 명칭 green consumer라는 말이 점점 기묘하게 보이기 시작했지만, 위와 같은 맥락에서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기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Green Consumer는 백과사전에까지 등록된 명실상부한 신조어입니다. (Green Consumer의 뜻 바로가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환경을 상징하는 초록의 Green과 소비를 뜻하는 Consume라는 두 개의 단어 조합은 뭔가 모순되고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소비는 어떠한 형태로든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게 대부분이니까요.

게다가 무언가를 소비한다는 것은 소유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소유물이 과연 소유자의 특징을 규정지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친환경용품을 소유하거나 소비한다고 해서, 그를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환경사랑은 특정 상품의 소비를 통해 완성되는 개념일까요?

우리는 종종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기 위해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곤 합니다. 사람을 채용할 때에 그의 지적 수준을 알기 위해 그가 소유한 학위나 자격증을 살펴 보고요. 타인이 소유한 차나 집을 보고서 그의 생활수준을 판단하지요. 연봉의 액수가 곧 자신의 능력이며, 직위나 직책이 곧 자신의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소유가 곧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이러한 논리로 따져보면, 덜 가진 사람은 덜 가져서 불행하고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지 못해 불행하지요.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소유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며,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소유(Having)에 집착하는 부류와 존재(Being)에 집중하는 부류로 말이죠.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값을 높이거나 사회적 특권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공부하고, 더 많은 물질적 가치를 소유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존재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능동적이고 체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들을 발견합니다.

어떤 제품을 소비하고 무엇을 소유하느냐라는 기준을 가지고서 Green Consumer를 규정짓는다면, 이 공간은 또다른 소비, 또다른 소유를 부추기는 꼴이 됩니다. 세제를 넣지 않더라도 세탁이 가능한 세탁기가 나왔다고 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일반 세탁기는 당장 버리고 새것을 구입해야 그 사람이 Green Consumer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가 곧 우리의 존재는 아니니까요.

가래떡이 가래+떡(....!)이 아니듯, Green Consumer가 반드시 Consume을 전제로 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Green Consumer로서 갖춰야 할 것은 특정제품 소비가 아니라 4R (Reuse, Refuse, Reduce, Recycle)의 자세입니다. 쓴 물건을 다시 쓰고 환경에 유해한 제품은 거절하고, 소비를 줄이고, 재활용을 생활화하는 것이죠. 소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기를 희망합니다. 소유나 소비는 결코 죄악이 아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답은 아닙니다. 소유를 통한 만족은 결국 또다른 이름의 감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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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어학연수 시절에 주머니 가벼운 학생 신분으로 파리의 근사한 식당이나 호화로운 쇼핑은 꿈도 못 꾸었으나, 꼭 하고픈 게 한가지 있었습니다. 프랑스 뮤지컬 중에 정말 레전드급인 스타마니아(Starmania)를 보는 것이었죠! 때마침 Casino de Paris라는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저는 무작정 길을 나섭니다. 티켓 오피스 직원에게 학생 할인 같은 건 없냐고 조심스레 묻자, 가장 앞자리 티켓을 반값도 안되는 가격에 제공! 꺄아아 >_<

스타마니아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뮤지컬로써, 미쉘 베르제(Michel Berger)가 작곡을 하고 뤽 플라몽동(Luc Plamondon)이 작사하여 1976년에 제작되었습니다. 극중 배경은 2000년대의 가상의 도시 모노폴리스입니다. (제작 당시로 치면 30여년 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 거죠. ㅋㅋ)
 
스타마니아는 7명의 서로 다른 인물들의 사랑과 고독, 성공과 좌절, 꿈과 권력과 같은 수많은 주제들을 다룹니다. 참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그들의 엇갈리는 사랑들을 볼 수 있지요. 스타를 꿈꾸는 게이 남성 Ziggy와 그를 짝사랑하는 웨이트리스 Marie, 상대를 파멸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이에게 빼앗기기를 거부하는 Sadia, 서로를 향한 불꽃같은 사랑을 하는 Johnny와 Cristal, 그리고 돈과 권력으로 사랑을 사는 Janvier, 한물 간 은막의 스타 Stella.....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매력은 아름다운 음악에 있습니다. 암울한 분위기와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오래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주옥같은 명곡들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동영상 클릭클릭! 


<Monopolis>



<Le monde est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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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묻습니다. 문왕의 동산이 사방 칠십리라고 했는데 정말이었느냐고 묻자 맹자가 답하되 옛 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대답합니다. 그토록 컸느냐고 왕이 재차 묻자 맹자가 답하기를 백성들이 이를 오히려 작다고 여겼다고 말합니다. 왕이 다시 묻지요. "과인의 동산은 고작 사방 사십리인데 백성들이 오히려 크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습니다. "문왕의 동산 사방 칠십리에는 꼴베고 나무하는 사람이 그곳에 가고, 꿩과 토끼잡는 사람들이 그리로 가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썼으니, 적다고 한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처음 제나라 국경에 이르러 나라에서 크게 금하는 것을 물은 후에야 감히 들어왔습니다. 신이 들으니 교외와 관문 사이에 동산이 사방 사십리인데, 그 안에 있는 사슴을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죄와 같이 다스린다고 하니, 사방 사십리나 되는 함정을 나라안에 파 놓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크다고 여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포스팅을 준비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어요. 정말 유용하고 좋은 친환경용품에 관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 이곳 사이트에도 올리고 싶어지는데, 대부분의 뉴스 말미에 붙은 "무.단.전.재.및.재.배.포.금.지."라는 문구 때문이지요.

이렇게 좋은 정보를 왜 혼자 가지려고 하나 싶기도 하고 다같이 공유하면 더 좋을텐데 혼자 다 가져서 뭘 어쩌려는 건가 싶거든요. 작가의 상상력이나 주장이 덧붙여진 글의 저작권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야말로 정보로 이루어진 사실 중심의 뉴스까지 그렇게 "여기 땅은 내 땅"을 주장해야 하나 싶어서요. 서운하기만 합니다. 하긴 그 사실을 밝히고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 기자분들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니 혼자 그냥 투덜거려 봅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저작권 기간이 모두 만료된 맹자님 말씀이나 인용할랍니다. 맹자님 말씀에도 보면 나오잖아요. 죄다 내 땅이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사슴 한마리라도 잡으면 가만 안둔다고- 으름장 놓다보면, 사람들의 원망을 사게 됩니다. 혼자 갖기보다는 함께 나누려는 마음도 필요한 게 아닐까요. 열린 마음으로 나누려고 하다보면, 사람들도 사방 칠십리가 오히려 작다고 할거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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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꿈은 *전인적 인간*이 되는 것이야요. 

어떤 특정한 분야에만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제 눈에 그저 *기능인* 일 뿐, 별로 부럽지는 않아요. 여러 분야에 대해서 해박하고 지적/감성적/사회적/도덕적/신체적으로 적당한 균형 감각을 지닌 사람들을 어릴 적부터 저는 동경해 왔습니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절로 감탄이 나오고, 저 역시 그렇게 되고픈 맘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전인적 인간되기* 프로젝트 제 1 단계로써 각종 action item들을 다이어리에 적었습죠. 악기 한 가지쯤 다룰 줄 알아야 전인적 인간이 아닌가 싶어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플룻을 꺼냈구요. 1년에 책 200권쯤은 읽어야 전인적 인간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전자책 단말기도 구입하기로 했죠. 몸도 튼튼해야 할 것 같아 꾸준히 운동도 하기로 하고...하악하악

그런데 오늘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더라구요. 전인적 인간이 도대체 뭐지? 그래서 네이버 사전에 *전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지(知)ㆍ정(情)ㆍ의(意)를 모두 갖춘 사람"이라 떡하니 나오네요. 햐..거참~ 멋진 말인데 아무래도 저랑은 너무나 거리가 멀어요.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내게 해당 사항은 없으니...쿨럭쿨럭...

엠....뭐...전인적 인간은 고사하고, 2011년에 저는 그냥 *인간*이나 되어야 할까봐요. -_-

피에쑤. "플룻을 불면 나도 전인적 인간이 되는걸까?" 라는 제 질문에 누군가 답하더라구요. 플룻을 불면 전인적 인간이 되는 게 아니고 그냥 *플룻 불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거라고....털썩.

빌 게이츠는 2007년도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으며 처음으로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란 기업 이윤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빈곤층의 삶을 개선하는 활동에 노력하자는 주장으로써, 효율성과 형평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빌 게이츠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도 “각국 정부 및 비영리단체들과 협력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는 기업이 단순한 사회적 책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빈민층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행하는 기업활동을 뜻합니다. 즉 기존의 구호물품과 봉사자만을 투입하던 것을 벗어나, 자선활동을 비즈니스화하고 각국의 정부와 초일류 기업들의 연대를 통한 활동을 말하는데요. 빌 게이츠는 기업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데 중점을 둔 사업을 창출해야 하며, 이러한 시스템은 기업의 수익을 올리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시장의 힘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삶 또한 개선시키는 두 가지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창조적 자본주의는 전혀 색다를 것 없는 어찌보면 약간은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유럽에는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 온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 Oblige)가 있었고, 한국에는 경주 최부자집의 철학 -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으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등의 신조들- 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창조적 자본주의의 핵심은 단순한 기부가 아닌, 시스템의 변혁을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에 어떤 사람이 정확한 시간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면, Time Teller로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사후에도 모든 사람들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끔 벽시계를 만드는 일을 하여 Clock Builder가 된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더욱 큰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빌 게이츠의 기부 행위를 탈세를 위한 꼼수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 그는 참 멋진 경영인입니다. 멋진 말을 하는 경영인들은 한국에도 많이 계신데, 연설만큼이나 행동으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하버드 졸업 연설에서 빌 게이츠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보다 많은 의무가 요구된다"라는 말을 하는데요. 지금까지 그는 이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버드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을 올립니다.


Bok 총장님, Rudenstine전 총장님, Faust 차기 총장님, 하버드 법인과 감독위원회 위원 여러분, 교수위원회 위원여러분, 부모님들, 특히 이번 졸업생 여러분,

저는 “아빠, 나는 언젠간 학교에 돌아갈 것이고 졸업장을 받을 거라고 항상 말했었잖아요” 라는 이 말을 하기 위해 30년 이상을 기다려 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의 적절한 영예에 대해 학교측에 감사드리며 저는 내년에는 제 직업을 바꿀겁니다.(MS에서 물러나서 자선활동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함). 그리고 이제 제 이력서에도 대학 졸업학위가 생겼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군요.

저는 오늘 저보다 훨씬 빠르게 학위를 취득한 졸업생 여러분들께 박수를 보내며 저에게 Crimson(Harvard 학교신문)이 하버드 중퇴자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데 대해 매우 행복합니다. 저는 그러한 칭찬이 저로 하여금 오늘 졸업생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졸업 연설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중퇴자 중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제 친구 Steve Ballmer가 경영대학원을 중퇴하도록 꼬인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즉 저는 악영향이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왜 제가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초대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들의 입학식에 연설을 하러 왔다면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Steve Ballmer처럼 중퇴를 했을 것이라는 의미)

하버드 시절은 저에게 경이적인 경험이었습니다. 학교생활은 매력적이었으며 저는 종종 제가 수강 신청하지 않은 많은 수업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기숙사 생활도 아주 멋졌습니다. 저는 래드클리프에 있는 Currier House에 있었는데 제 방에는 항상 밤 늦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토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아침에 늦잠 자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그것 때문에 저는 반사회적 그룹의 리더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존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입증하기 위해 서로 밀착했었습니다.

래드클리프는 생활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남자보다 여학생이 많았고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수학, 과학 등 이과생타입 이었습니다. 그러한 조합은 만약 여러분들이 제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면, 최고의 가능성을 제공하였으나 이곳에서 저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슬픈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버드시절의 가장 중요한 기억은 1975년 1월에 일어났는데 그 때 저는 제 기숙사에서 세계 최초의 개인용컴퓨터를 생산하기 시작한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소재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들에게 소프트웨어를 사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제가 단지 기숙사에 있는 학생임을 알아채고 전화기를 내려놓을까봐 걱정을 했지만 그들은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고 한달 뒤에 연락하세요” 라는 회신을 했으며 저도 아직 소프트웨어가 덜 완성된 때라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밤낮으로 이 조그마한 프로젝트를 완성하는데 주력했는데 그 것이 제가 학업을 중단하고 Microsoft와의 중요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하버드 시절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열정과 지식의 가운데서 보낸 것들입니다. 그것은 들뜨는 일이거나 위협스런 일 혹은 실망스러운 때일 수 도 있었지만 항상 무언가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일찍 학교를 떠났지만 제가 보낸 하버드시절과 그 당시 쌓았던 우정 그리고 아이디어들은 고스란히 저에게 전달되었으며 그 것은 놀라운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저는 크게 한가지 후회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저는 세계의 지독한 불균형, 즉, 세계 수백만 사람들의 생활을 절망에 빠뜨리는 부와 건강 및 기회의 심각한 불평등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없이 하버드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 하버드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의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 배웠고 과학이 이룩한 진보들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의 가장 위대한 진보는 그러한 발견이 아니라 어떻게 그러한 발견들이 기존의 불평등을 해소하도록 적용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통하거나 강력한 공공교육, 양질의 의료서비스 혹은 폭넓은 경제적 기회를 통해서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성취하는 최상의 것입니다.

나는 이 나라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캠퍼스를 떠났으며 또한 개발도상국의 수백만 명이 말로 할 수 없는 참담한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것도 몰랐고 그 것을 깨닫는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버드에 올 때는 시대가 달랐습니다. 즉, 여러분들은 선배들보다 세상의 불평등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으며 저는 지금과 같은 급격히 발전하는 기술의 시대에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불평등을 직시하고 해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여러분들이 고민할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일주일에 몇 시간 혹은 한 달에 몇 달러를 어딘가 기부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당신이 그 시간이나 돈이 어딘가에서 생명을 구하고 삶의 질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곳에 사용되기 원한다면 그 곳은 어디일까요?

멜린다와 저도 같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가진 것들을 이용하여 최대 다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풀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토의 중, 우리는 이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질병들로 매년 빈곤국의 수백만의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즉, 홍역, 말라리아, 폐렴, B형 간염, 황열병 등 말입니다. 이러한 질병 중 제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로타 바이러스라는 질병은 매년 50만명의 어린이들을 사망케 합니다. 물론 미국내에서는 전혀 없는 일이죠.

우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약 수 백만명의 어린이들이 죽고 있다면 그들을 살릴 수 도 있다는 가정을 하였고 세계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치료약들을 발견하고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1 달러도 안 되는 금액에 대해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그 약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간섭(이권)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믿는다면 누군가의 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불쾌할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게 진실일 리 없어. 그러나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것이 우리 기부에 있어 우선권이 주어져야 해”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식으로 우리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세계는 이러한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했지만 비정했습니다. 시장은 이러한 어린이들을 구하는 행위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았고 정부 또한 이러한 일을 장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위 시장내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목소리도 낼 수 없는 부모들을 둔 어린이들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저는 그러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좀더 “창조적인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면 우리는 시장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즉, 시장의 힘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내고 혹은 적어도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게 한다면 지금 최악의 불평등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전 지구상의 정부들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보다 잘 반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금을 사용해 달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습니다.

사업에서 이익을 내거나 정치인들에게 투표를 하는 방식 등을 통해서 빈곤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 것은 이 세상의 불평등을 감소시키는데 지속적으로 기여할 것입니다. 이러한 임무는 개방형으로서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에 응전하는 지속적 노력을 통해 이 세계는 변화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낙관적입니다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비관론은 "불평등이란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 하여 왔으며 종말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실제로 우리는 훨씬 많이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인류의 비극을 보아 왔습니다만 그 상황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도울 방법을 알았다면 우리는 행동했을 것입니다.

변화를 막는 장벽은 지나치게 적은 관심이 아니라 고도의 현실적 복잡성 때문입니다.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우리는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고 그로 인한 미칠 영향을 파악하는 3단계가 필요하지만 복잡성이라는 것이 이러한 3단계의 진행을 막고 있습니다.

비록 인터넷이 있고 24시간 뉴스 프로그램이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데는 많은 복잡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만약 비행기 추락사고가 나면 정부에서는 즉시 언론 인터뷰를 실시합니다. 그들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원인을 규명하고 향후 유사한 사고에 대비한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만일 정부가 지나치게 솔직하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오늘 이 지구상에서 예방 가능한 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 중 단지 0.5%만이 이 사고 비행기에 탑승했었으며 우리는 그 0.5%의 사람들을 빼앗아 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비행기 사고가 아닌 예방 가능했던 수 백만의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들에 대해 자세히 읽지는 않습니다. 언론은 주로 최신뉴스를 다루고 수백만명의 사망은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무시하기 쉬운 이면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그 기사를 보거나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만약 그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도와야 할 지 알지 못하게 되면 더욱 그 참상에 대해 시선을 고정시키기 어려워서 결국 외면하게 됩니다.

첫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문제의 직시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2단계로 접어들어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복잡한 것들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서 해결책의 발견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어떻게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확실하고 입증된 답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실행에 옮길 수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어떠한 관심도 헛되이 되지 않고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잡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실행에 옮겨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심지어 어떠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도 어렵게 만듭니다.

해결책을 발견하기 위해 복잡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4가지의 예상 가능한 단계로 연결됩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최고의 수단을 발견하며 그 수단을 성취할 최고의 기술을 발견하며 기존의 기술을 적용할 최고의 애플리케이션을 만듭니다. 약처럼 복잡한 것이든 침대망처럼 단순한 것이든 관계없죠.

에이즈를 예로 들겠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의 목표는 그 질병의 퇴치입니다. 최고의 수단은 예방입니다. 최고의 기술은 단 한알로 평생 면역이 되는 백신입니다. 따라서 정부나 제약회사 혹은 기금들은 백신을 위한 연구를 후원합니다. 그러나 그 작업은 1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므로 그 동안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일을 하여야 합니다. 즉,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예방책은 사람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 목표달성을 위해 다시 4단계 접근법이 적용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패턴입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생각하고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20세기에 말라리아와 결핵에 대해 너무 복잡해서 포기했던 과오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은 후 마지막 단계는 여러분들이 한 일이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고 당신의 성공과 잘못을 타인과 나눔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노력에서 무언가를 배우도록 하는 일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통계자료가 필요합니다. 수행하는 프로그램이 수백만의 어린이들에게 백신을 놓는 일이라는 것과 그러한 질병으로 사망하던 어린이들의 숫자가 감소한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것은 단지 그 프로그램의 질을 개선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기업과 정부로부터 보다 많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싶다면 단지 숫자가 아닌 그 이상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즉, 그 작업의 인간적인 면을 전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구하는 일은 가까운 친지에게 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다보스 포럼에 가서 글로벌헬스의 패널로 참여하여 수백만의 생명들 구하는 방법에 대해 토의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수백만! 단 한 명의 목숨을 구하는데 따른 온몸의 전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것이 수백만이 되다니요... 그러나 그 회의는 제가 경험해 본 중 가장 지루한 패널이었으며 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제가 어떤 소프트웨어의 13번째 버전인가를 소개하는 이벤트에 갔을 때 흥분해서 점프하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소프트웨어에 대해 흥분에 휩싸인 사람들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더 흥분하지 않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사람들을 도와서 그 영향력을 보고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람들을 흥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복잡한 질문입니다.

아직 저는 낙관론자입니다. 불평등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잡성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방법들은 이제 나온 것들이며 그 방법들은 우리가 우리의 관심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앞으로의 미래는 과거와는 다를 것입니다.

이 시대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생명공학, 컴퓨터 및 인터넷의 혁신은 극심한 빈곤과 예방가능한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고 있으며 그 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기회들입니다.

60년전, 조지 마샬이 이 졸업식에 와서 전후의 유럽을 지원하는 플랜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의 어려움은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내용이 엄청나게 복잡하다 보니 사람들로 하여금 현 상황에 대한 간결한 평가를 하기가 매우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 상황에 대한 모든 중요한 점들을 빠뜨리지 않고 파악하기는 실로 불가능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샬이 그 연설을 한 후 30년 뒤 제가 없이 저의 친구들이 학교를 졸업할 때, 세상을 보다 작고, 보다 개방되어 있고, 명백하게 만들고 가깝게 만들 기술들이 막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렴한 가격의 개인용 컴퓨터는 교육과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를 전달하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출현하도록 했습니다.

이 네트워크의 놀라운 점은 단지 거리의 제약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이웃이 되게 하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동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총명한 사람들의 숫자를 엄청나게 증가시켰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것을 통해 거의 경이로울 정도로 혁신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기술에 접속하여 있지만 5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즉,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이 이 토의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지식과 관련된 경혐을 가지고 있지만 기술을 모르는 스마트한 사람들이 그들의 재능을 연마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로 세상에 기여할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수준의 기술에 접근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보는 인류로 하여금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일들의 혁신을 촉진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보는 단지 국가정부 차원이 아닌 대학교, 회사, 중소규모단체 및 심지어 개인들이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을 위한 접근법을 모색하며 미칠 영향을 측정함 으로서 조지 마샬이 60년 전 언급했던 빈곤, 기근 및 절망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측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버드 가족 여러분, 여기 캠퍼스는 전세계에서 모인 인재들의 집합소 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일까요?

여기 하버드 교수 여러분, 동문, 학생 및 기부자 분들이 전세계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본인들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버드가 하버드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의 삶을 증진시키는데 그 지식을 바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하버드 지식의 리더이신 학장님과 교수님들께 요청합니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교수를 영입하거나 종신교수권을 받거나, 교과과정을 검토하거나 각 학위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결정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의 최고의 마인드가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쳐지고 있나?
 
하버드는 교수들이 세계 최악의 불평등을 직시하고 고민하도록 권장하고 있는가? 하버드 학생들은 글로벌한 빈곤이나, 만연한 배고픔, 물 오염, 학교에 못나오는 여학생들 및 우리가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죽은 아이들 등에 대해 배우고 있는가?

지구상 가장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최저의 권리를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배우고 있는가?

이것들은 어떤 미사여구의 질문들이 아니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철학을 가지고 답변을 해야 합니다.

제가 이곳에 입학이 결정 나던 날 자긍심에 넘치셨던 제 어머니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많이 베풀라는 압력을 저에게 넣었습니다. 제 결혼식 며칠 전 어머니는 결혼전의 신부이벤트를 주관하면서 멜린다에게 쓴 편지를 큰 소리로 읽으셨습니다. 그 당시 제 어머니는 암으로 고생하였는데 그 편지에 담긴 내용에서 다시 한번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즉, 편지의 말미에 어머니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보다 많은 의무가 요구된다"라고 썼습니다.

여러분의 이 캠퍼스의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들을 생각해보면 재능, 특권 및 기회 등 세계에서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권리에는 거의 제한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약속에 부응하기 위해 저는 여기 모든 졸업생 모두가 심각한 불평등 같은 복잡한 문제를 직시하고 그 것에 전문가가 되기를 권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향후 경력의 중심에 항상 이것을 둔다면 그 것은 정말 경이로운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향을 미치기 위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매주 몇 시간 여러분들은 엄청난 파워의 인터넷에서 지식을 쌓고 동일한 관심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고 장애물을 파악한 다음 그것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 됩니다.

복잡한 현실이 당신을 멈추지 못하게 하십시오, 행동하는 사람이 되시고 불평등을 직시하십시오. 그것은 당신 인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졸업생들은 정말 환상적인 시대에 사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버드를 떠나게 되면 여러분들은 우리 세대의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술을 가지게 될 것이고 우리가 몰랐던 글로벌한 불평등에 대해 인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지를 바탕으로 여러분들의 매우 작은 노력으로도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의 소리에 고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희 세대보다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조속히 시작하시고 그리고 오래도록 지속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여기 하버드에 돌아와서 여러분들의 재능과 열정으로 이루어 온 일들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이룬 프로페셔널한 업적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전 세계의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했는지를 포함하여 스스로를 평가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인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타지역의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기여했는지를…

감사합니다.


Bill Gates Speech at Harvard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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